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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를 짓다(1445년 4월 5일>
의정부 우찬성 권제와 우참찬 정인지, 그리고 공조참판 안지가 10권의 책을 올리며 아뢰었다.
목조가 처음 터전을 마련하실 때부터 태종의 잠저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적을 빠짐없이 찾아 모았습니다.......옛일을 증거로 하여 노래는 국어로 쓰고, 시(詩)를 지어 그 말을 풀이하였습니다.......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25장입니다. 삼가 쓰고 제본하였으니 아뢰옵니다.(<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4월 5일)
목조부터 태종까지의 사적을 모아, 그것을 근거로 125장의 노래를 썼다고 했다. 노래는 국어로 썼다고 하니, 훈민정음으로 쓴 것이다. “시를 지어 그 말을 풀이하였다.”라고 하여, 한문으로 시를 지어 훈민정음으로 쓴 노래를 해설했다고도 했다.
세종은 책을 받고 기뻐하며 노래 제목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고 붙였다. ‘용비어천’이란 ‘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라는 의미이다. 용은 여섯 임금, 즉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을 가리킨다. 그들 중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실제 임금이 아니고 추대된 인물들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라고 했다. <용비어천가>는 그 여섯 임금의 자료를 모아 노래한 것이다.
세종은 재위 24년경부터 <용비어천가>를 염두에 두고 자료를 모았다. 그러나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내세울 게 별로 없는 인물들이라 문헌 자료가 없었다. 태조와 태종만 해도 조선 개국 후의 문헌 자료는 많지만, 그 이전의 문헌 자료는 드물었다. 그래서 세종은 구전 자료를 모았다. 재위 24년 3월에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한 내용을 보자.
홍무13년(1380년) 9월, 왜구가 떼를 지어 육지로 올라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군대를 정비하여 이끌고 나가 소탕하였으니, 그 훌륭한 공과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때 군마의 수효, 적을 제어한 방책, 접전한 수와 적을 함락시킨 광경 등을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러 고을에 산재한 노인들을 찾아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라.(<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일)
목격자를 찾아서 기록하라고 했다. 반드시 목격한 것일 필요는 없다. 소문으로 들은 내용도 당연히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렇게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종은 권제, 정인지, 안지에게 노래를 지으라고 했다.
세종은 왜 <용비어천가>를 지으라고 했을까? 세종은 제1장~제4장 그리고 마지막 장인 125장을 작곡하여, 거동할 때나 잔치가 있을 때 연주하게 했다. 그 다섯 개의 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작곡한 곡의 제목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했는데, ‘백성과 함께 즐긴다.’라는 말이다.
우선, <용비어천가>의 제1장과 제2장을 보자.
해동 육룡(海東六龍)이 나니 일마다 천복(天福)이시고 고성(古聖)이 함께 하시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새, 꽃 좋고 열매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 그칠새, 내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
제1장에서 해동 육룡은 목조에서부터 태종까지 여섯 임금을 가리킨다. 해동 육룡이 날았다는 것은 여섯 임금이 뜻을 펼쳤다는 말이다. 여섯 임금이 뜻을 펼치자, 하늘이 복을 내려주어 뜻을 이루었는데, 옛 성인들의 경우와 같다고 했다. 그래서 제2장에서 조선 왕실의 뿌리와 근원이 깊다고 했다. ‘뿌리 깊은 나무’에 열매가 많이 열리고, ‘샘이 깊은 물’이 흘러 바다에 이르듯 조선 왕실이 크게 번영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집안은 보잘것없었다. 전라북도 전주에 살다 일이 생겨 여진족이 사는 북쪽으로 쫓겨간 집안이었다. 왕실의 뿌리와 근원이 깊다고 주장하자면 태조의 조상들을 미화해야 했다. 그래서 민간의 전설이나 설화를 활용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시련을 이겨낸 대단한 인물들이라고 칭송했다.
다음으로 제3장과 제4장의 내용을 보자.
옛날 주나라 대왕이 빈곡(豳谷)에 사시어서 제업을 여시니
우리 시조가 경흥에 사시어서 왕업을 여시니.
적인(狄人) 사이에 살다 적인이 침범하여 기산(岐山)으로 옮긴 것도 하늘의 뜻이니
야인(野人) 사이에 살다 야인이 침범하여 덕원(德源)으로 옮긴 것도 하늘의 뜻이니
제3장에서 중국 주나라 대왕 고공단보가 빈곡에 산 것과 ‘우리 시조’ 목조가 경흥에 산 것을 비교했다. 그곳들이 나라를 여는 시초가 된 곳이라고 했다. 제4장에서는 고공단보가 적인, 즉 오랑캐의 침범을 받아 기산으로 옮긴 것이 하늘의 뜻이듯, 익조가 야인, 즉 여진족의 침범을 받아 덕원으로 옮긴 것 역시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
이렇듯 제3장과 제4장에서는 주나라의 시조와 조선의 시조를 비교하여, 주나라의 개국과 조선의 개국이 같은 것이라고 했다. 주나라와 조선이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개국한 나라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제 마지막 장인 125장을 보자.
천 년 전에 미리 정해진 한강 북쪽에,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어 나라의 운명이 끝이 없으니
성스러운 임금이 이으셔도 경천근민(敬天勤民) 해야 더욱 굳어지리니
임금아 아소서. 낙수(落水)에 사냥 가서 할아버지를 믿으십니까.
후대 임금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천 년 전에 하늘이 정해 놓은 한양에서 나라를 열었다고 하여, 조선 개국이 천명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래서 나라의 운명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지만, 임금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낙수의 사냥은 중국 하나라 태강왕의 얘기이다. 태강왕은 매일 사냥이나 하면서 정치를 등한시하다 쫓겨났다. 조상만 믿고 태강왕처럼 한다면 나라가 망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그래서 후세 임금들에게 경천 근민하라고 당부했다. 하늘을 존경하고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라는 말이다.
세종이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밝히며 후세 임금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자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그렇다고 <용비어천가>가 후세 임금만을 위한 책은 아니었다. <용비어천가>를 훈민정음으로 지었다는 점에서 볼 때, 세종은 백성들도 <용비어천가>를 읽기 바랐던 것 같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들이 읽어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아는 게 필요했다. 세종은 550부를 인쇄하여 배부했다.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상당한 양의 부수를 인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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