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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원이 설치되다(144293)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첨사 1인은 종3품으로, 동첨사 2인은 정4품으로 하되, 서연관이나 한가한 관원 중에서 인물과 기량이 상당한 자를 선택하여 겸임하게 하소서.(<세종실록> 97, 세종 2493일)

 

첨사 1인과 동첨사 2인을 임명하라고 했다. 첨사와 동첨사는 세자를 가르치는 벼슬아치인 서연관이나 한가한 벼슬아치 중에서 겸임하게 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세종은 의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첨사원이 설치되었다.

첨사원이란 무엇인가? 세종의 말을 들어보자.

 

중국의 황태자에게는 공부를 담당하는 부서와 아울러 첨사부가 있어서 사무 처리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왕세자에게는 서연관이 있어서 공부와 아울러 사무를 담당하고 있으니 옛 제도에 합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무를 처리하는 관원을 두지 않을 수 없다.(<세종실록> 97, 세종 24728일)

 

첨사원은 왕세자의 사무 처리를 지원하는 부서임을 알 수 있다. , 왕세자가 임금의 업무 중 일정 부분을 맡아 처리할 수 있게 지원하는 부서이다. 그러므로 세종은 첨사원을 설치하여 세자에게 일정 업무를 맡기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여러 가지 질병을 앓았는데 특히 눈병이 심했다.

 

나의 눈병이 날로 심하여 중요 업무조차 친히 결단하기 어려우니, 일반 업무 처리는 세자에게 맡기고자 한다.

(<세종실록> 96, 세종 2453일)

 

중요 업무만 직접 처리하고, 일반적인 업무는 세자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세종이 이런 뜻을 밝힌 건 이미 5년 전부터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세종은 자신의 건강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벼슬아치들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벼슬아치들은 세종의 나이를 주된 반대 이유로 들었다. 세종의 나이 40대 초중반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일시적이니, 그때에는 의정부에 업무 처리를 맡기면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비단 나이만이 이유였을까?

 

만약 그러하오면 세자와 권력을 나누게 되는데, 세자의 부하 중에 만일 사람답지 않은 자가 있다면 이간질하여 틈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세자와 권력을 나누는 것을 옛사람이 삼갔습니다.(<세종실록> 84, 세종 21113일)

 

참찬관 김돈이 한 말이었다. 참찬관은 임금의 공부를 관장하는 벼슬이다. 세자에게 업무를 맡기면 권력이 나뉘게 된다. 그로 인해 임금과 세자의 의견이 갈라져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세종이 즉위했을 때, 태종이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니, 중요 업무는 태종이 처리하고 일반 업무는 세종이 처리했다. 그때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을 제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을 주도한 사람은 태종이었다. 그때 태종은 중국에서 우리 부자(태종과 세종) 사이에 변고가 있다고 잘못 알까 염려된다.”고 했다. 심온 사건이 태종과 세종의 갈등으로 비추어질까 걱정했던 것이었다. 권력이 나뉘면 권력자 사이에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다. 태종이 심온을 제거했던 것도 심온이 세종 세력을 모은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벼슬아치들의 주장에 수긍했다. 그래서 세자에게 업무 맡기는 것을 미루어왔다. 그런데 세종24년에 이르러,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만큼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이었다. 세종은 자기의 생각을 밀어붙였고, 의정부의 동의를 첨사원을 설치했다. 마침내 세종24916, 세자가 정사를 보기 시작했다.

세종이 첨사원을 밀어붙인 데에는, 단지 건강문제만 작용하지 않았다. 흥천사 문제로 인한 시달림 또한 한 요인이었다. 흥천사는 태조가 부인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세종은 세종19(1437) 흥천사 수리를 명령했고, 세종23(1441)에는 흥천사 수리 완료를 기념하는 경찬회를 허용했다. 그러자 벼슬아치들이 반대에 나섰다.

벼슬아치들의 반대는 집요했다.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나라에서 임금이 나서서 절을 수리하고 불교 행사를 승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벼슬아치들은 매일 상소문을 올리고 면담을 하며 세종에게 따졌다.

이때 세종은 정치에 대해 피로감을 느꼈다. 세종은 벼슬아치들을 피하고자 했다. 그 한 방법으로 자주 광평대군(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집으로 피난 갔다. 세자에게 일상 업무를 맡기려 한 것도 벼슬아치를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세자에게 일상 업무를 맡기며 앞으로는 열흘에 한 번씩 정사를 보겠다.”라고 한 것에서 세종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세종은 세자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주려고도 했다.

 

나의 병이 날마다 심해져서 이미 조회를 받지 못하고, 이웃 나라의 손님을 보지도 못하고 항상 깊은 궁궐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내관을 통해 크고 작은 일을 전달하니 일에 착오가 많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억지로 처리하다 다른 병이 생길까 두려우니, 세자에게 임금 자리를 넘기고 나는 편히 수양하면서 나라의 중대한 일만 처리하고자 한다.

(<세종실록> 108, 세종 27428일)

 

세종은 벼슬아치들이 반대하자 철회했다. 그렇지만 이후로는 대개의 일을 세자에게 맡기고, 정치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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