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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열람을 포기하다(143832)

 

세종이 말했다.

 

<태조실록>을 보고자 여러 신하에게 상의하였더니, 유정현 등이 조종이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조종의 사업을 잘 이어받으려는 것은 아름다운 뜻입니다.”라고 하여 볼 수 있었다. 지금 또 생각하니, 조종이 정한 법을 보는 데에 있어 조와 종에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대신과 상의하라.(<세종실록> 80, 세종 2032일)

 

<태종실록>을 보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의정부 겸춘추대신 영의정 황희, 의정부 좌찬성 신개 등이 말했다.

 

중국 당나라 태종이 사기(史記)를 보고자 하니, 저수량과 주자사 등이 폐하께서 혼자서 보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만약 사기를 보는 법이 자손에게 전해지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두둔하여,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 신하가 임금의 뜻에 순응하여 제 몸을 보전하려 할 것이니, 천년 후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였으니, 신 등의 논의는 바로 이 말과 같습니다.(<세종실록> 80, 세종 2032일)

 

중국 당나라 태종 때의 사례를 들어 반대했다. 세종이 <태종실록>을 본다면 후대의 임금들도 실록을 보려 할 것이다. 그러면 사관들이 몸을 사려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후대에 누가 실록의 내용을 믿겠는가. 세종은 춘추대신들의 의견대로 <태종실록> 열람을 포기했다.

세종은 이전에도 <태종실록>을 읽고자 했다. 춘추관에서 <태종실록> 편찬을 마친 직후였다. 그때에는 우의정 맹사정, 대제학 윤회 등이 반대하여 읽는 것을 포기했다(세종13320). 세종은 왜 <태종실록>을 읽고 싶어 했을까? 세종이 갑자기 이숙번을 부른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숙번은 태종의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1차 왕자의 난 때(1398), 이숙번은 사병을 동원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태종의 정적을 제거했다. 2차 왕자의 난 때(1400)에는 이방간이 태종에 반대하여 일으킨 난을 진압했다. 그런 공로로 이숙번은 두 차례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태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는 등 최측근으로서 활약했다. 그런데 태종 재위 말엽, 이숙번은 무례하고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경상남도 함양으로 유배되었다(태종17, 1417).

유배된 지 20여 년이 지나자, 이숙번은 완전히 잊힌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불쑥 세종이 이숙번을 불렀다. 대다수 관리가 이숙번의 호출에 반대하자, 세종은 이숙번을 부른 데에는 까닭이 있다.”라고 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도승지 김돈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무인년(1398)과 경진년(1400) 때 일을 이숙번만큼 아는 이가 없다. 혹시 그때의 공신이 살아 있다고 해도 이숙번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이미 다 죽지 않았는가. 하루 이틀 동안에 다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친히 묻고자 하였으나, 생각건대, 짧은 동안에 다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개인 집보다 공관에서 여러 날 마주 앉아서 자세하게 묻고 받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세종실록> 83, 세종 201213일)

 

무인년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해이고, 경진년은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해이다. 세종은 이숙번을 통해 왕자의 난 때 일을 알고자 했던 것이었다. 왕자의 난은 태종이 정권을 잡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사건이었다. 유교 윤리에 따르면,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왕자의 난에 대해 자세히 알아둘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세종은 당연히 <태종실록>에 실린 평가가 궁금했을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평가이기에 아들로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태종실록>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반대하자 포기했다.

 

이번에 편찬한 실록에는 좋은 말과 바른 정치만이 실려 있어 다시 고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실록을 고치시는 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실록을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도 반드시 실록을 보고 고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관은 임금이 볼 것을 걱정하여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세종실록> 51, 세종 13320일)

 

<태종실록> 편찬 작업이 끝난 직후, 세종이 실록을 보겠다고 하자, 우의정 맹사성, 대제학 윤회가 반대하며 한 말이다. 세종이 실록을 보고 고쳤을 때 생겨날 폐단을 지적했다. 세종은 후대의 임금에게 모범이 되고자 했으므로 관리들의 반대를 받아들였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세종이 <태종실록>을 열람한 뒤 손을 댔다면, 이후 사관들이 몸을 사려 실록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이숙번을 소환한 것도 흥미롭다. 왜 잊힌 인물 이숙번일까? <태종실록> 편찬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 변계량이란 것과 연관된다. 변계량은 태종과 세종 시대에 걸쳐 20년 가까이 대제학을 지냈다. 대제학은 학문과 사상, 그리고 문화를 총괄하는 벼슬이니, 변계량이 <태종실록> 편찬을 맡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변계량이 하륜과 매우 가까운 게 문제였다. 변계량은 하륜의 집에 드나들며 배웠다.(<세종실록> 20, 세종 5623일) <태종실록>을 편집할 때에는 하륜에게 불리한 기사를 빼버릴 정도였다.(<세종실록> 48, 세종 12426일)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하륜은 의정부 좌정승까지 올랐다. 그렇지만 세종은 하륜을 신뢰하지 않았다. 세종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내가 하륜의 인물됨을 아는데, 학문이 해박하고 정치에 재주가 있어 재상의 면모가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였고 일 처리가 분명하지 않았다. 일을 아뢸 때마다 태종의 몸 상태는 생각지 않고 장시간 여염의 청탁까지 말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태종께서는 자리를 보전해주셨다.(<세종실록> 83, 세종 20127일)

 

세종은 하륜의 제자 변계량이 책임 편집한 <태종실록>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숙번을 소환했다. 이숙번은 하륜과 정적관계였다. 세종은 이숙번이 하륜 쪽에 의해 탄핵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이숙번을 소환하여 얘기를 들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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