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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을 정벌하다(1433419)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보고했다.

 

작년 12월에 파저강 인근에 거주하는 야인들이 우리의 북쪽 국경을 침략하므로, 신이 올해 119일에 명령을 받들고 길을 떠났사온데, 327일에 교서를 받들어 삼군 절제사 이순몽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419일 동틀 무렵에 쳐들어가 그 죄를 물어 여진족을 평정하였습니다.(<세종실록> 60, 세종 1555일)

 

파저강은 오늘날의 혼강을 말하는데, 압록강의 중국쪽 지류이다. 야인은 여진족을 말한다. 최윤덕은 파저강 인근에 살던 여진족을 정벌하게 된 이유, 경과, 그리고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보고했다.

그런데 여진족 정벌은 쉽지 않았다. 여진족이 강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진족과 중국의 관계 때문이었다. 우선, 세종의 말을 들어보자.

 

내 생각에는 동북의 야인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경계와 이어져 있어 나누지 못할 듯하니 끝까지 추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서북 야인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와 큰 강으로 나누어져 국경의 구분이 분명하며, 또한 중국과 가까워 내 마음대로 추격하여 잡으면 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두렵노라.( <세종실록> 58, 세종 141222일)

 

파저강 야인들이 국경을 침범하자,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동북의 야인서북의 야인을 구분했다. ‘동북의 야인은 두만강 일대에서 생활하는 여진족이고, ‘서북의 야인은 파저강 일대에서 생활하는 여진족이다. 동북의 야인은 대개 조선의 영토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이 동북 야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서북의 야인의 경우는 달랐다. 서북의 야인은 압록강 건너편 중국의 영토에서 사는 중국의 백성이었다. 따라서 서북 야인이 문제를 일으키면, 조선이 직접 징벌을 가하기 어려웠다.

세종14(1432) 129, ‘서북의 야인’ 400여 명이 평안도 여연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조선군 4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조선인이 잡혀갔다. 세종은 즉각 명나라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서북 야인을 추적, 정벌하자면 명나라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관리가 반대했다. 명나라 황제가 동의할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제3대 황제 태종은 야인이 침범하여 노략질하면 쫓아가 잡아서 모두 죽여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태종은 죽고 제5대 황제 선덕제가 재위하고 있었다.

조선의 조정에서 뚜렷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사이, 파저강 여진족의 추장 이만주가 홀라온에게서 조선의 백성 64명을 빼앗아 보호하고 있다며 연락해 왔다. 홀라온은 중국 쑹화강 상류에 살던 여진 부족이었다. 이만주의 말에 따르면, 홀라온이 조선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잡아갔고, 자신이 그 백성들을 구출하여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정의 다수 관리는 사람을 보내 백성들을 데려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자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못내 마땅치 않았다.

 

얼마 전, 경 등이 논의하기를, “파저강 야인들의 소행을 짐짓 모르는 체하고 논하지 말자.”라고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야인들이 우리 영토 가까이 있으면서 이유 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아 가는데, 나라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후일에 야인들이 자주 침범하게 되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59, 세종 15111일)

 

세종은 여진족 정벌을 결심하고, 최윤덕 등 장수들을 불러 준비하게 했다. 아울러 의정부, 육조, 삼군의 장수 등과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15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4월에 정벌하기로 했다. 한편, 세종은 명나라의 동의를 받는 작업도 진행했다. 상호군 김을현을 명나라에 보내, 여진족이 침범하여 조선의 백성을 잡아갔다고 알리며, 3대 황제 태종의 말을 상기시켰다.

선덕제는 여진족이 잡아간 조선 백성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엄히 타이르겠다.”라며, “만약 여진족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조선의 임금이 공격해도 좋다.”라는 교지를 보내왔다. 조건부 동의였다. 여진족을 타일러 해결을 시도해본 뒤, 성과가 없으면 정벌하라는 것이었다. 선덕제의 교지대로라면 정벌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이만주가 64명의 백성을 보내왔다.

그러나 세종은 정벌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무력을 과시하여 여진족이 다시는 조선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세종15(1433) 322, 세종은 최윤덕 등 장수와 병사들에게 전쟁을 준비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상호군 김을현을 명나라에 다시 보내, 서북 야인들이 그동안 조선을 침범했던 사실을 열거하며 여진족 정벌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도록 했다.

준비를 끝낸 조선군은 419, 파저강 여진족을 공격하여 하루 만에 평정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여진족 236명을 사로잡고 183명을 사살했다. 반면, 조선군 4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한 마디로 대승이었다.

세종은 승리 소식을 듣고, “진실로 기쁜 일이나 두렵다.”(<세종실록> 60, 세종 1553일)고 했다. 명나라의 태도를 걱정한 것이었다. 810, 명나라의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명 황제는 조선에서 보낸 보고와 이만주가 말한 내용이 다르다고 했다. 이만주는 조선의 백성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조선군이 공격하여 많은 백성을 죽이고, 황제가 내려준 칙유와 고명을 빼앗아갔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명 황제가 여진족 편을 든 것은 아니었다. 명 황제는 조선과 여진족이 화해하라고 했다. 세종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만주의 주장은 거짓이고 칙유와 고명은 빼앗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명 황제가 말한 대로 잡아 온 여진족을 돌려보냄으로써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여진족 정벌은 명나라와 관계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자칫 명나라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올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과감하게 무력 과시했고, 이후 서북의 야인들은 함부로 조선의 침범하지 않았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 세종의 외교정책이 있었다. 세종은 명나라에 대해 지극한 사대를 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도 세종을 지극히 신뢰했고, 영토를 침범한 사안에 대해서도 묵인했던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명 황제는 칙서를 보내, “야인들이 재차 침범하거든 즉시 무찔러 변방의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라.”(<세종실록> 71, 세종 18217일)고 했다. 이렇듯 세종은 외교를 통해 영토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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