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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하다(1430년 8월 10일)
호조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다음은 호조의 보고를 바탕으로 정리한 표이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0일에 근거하여 작성)
|
지역 |
응답자 |
찬성(비율) |
반대(비율) |
|
서울 |
1,330명 |
728명(55%) |
602명(45%) |
|
개성 |
1,197명 |
1,122명(94%) |
75명(6%) |
|
경기도 |
17,346명 |
17,105명(99%) |
241명(1%) |
|
평안도 |
29,842명 |
1,332명(4%) |
28,510명(96%) |
|
황해도 |
20.089명 |
4,471명(22%) |
15,618명(78%) |
|
충청도 |
21,056명 |
7,015명(33%) |
14,041명(67%) |
|
강원도 |
7,842명 |
944명(12%) |
6,898명(88%) |
|
함길도 |
7,478명 |
76명(1%) |
7,402명(99%) |
|
경상도 |
36,710명 |
36,317명(99%) |
393명(1%) |
|
전라도 |
29,819명 |
29,547명(99%) |
272명(1%) |
|
합계 |
172,682명 |
98,657명(57%) |
74,025명(43%) |
(<세종실록>에서는 반대자가 총 74,149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시된 반대자의 수를 합하면 74,025명이다. 누락된 인원이 있거나 계산상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려 17만 명 이상을 조사했다고 했다.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니 한 명 한 명 면접 조사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만한 규모로 조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왕조시대에는 여론조사를 하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이 의논하여 정책을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국민 여론은 중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여론조사를 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5개월 전, 호조에서 ‘공법(貢法)’에 근거하여 전답 1결당 세금 10두를 거둘 것을 건의했다.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 서울에 거주하는 전 현직 관리, 각 도의 감사와 수령 등 관리로부터 가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찬반을 물어서 아뢰라.”(<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3월 5일)라고 명령했다. ‘공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듣고자 했던 것이었다. 공법이 무엇이길래 여론조사를 명령했던 것일까?
당시 조선에서는 태종1년에 만들어진 손실답험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손실답험법은 논밭에 붙는 세율을 수확량의 1/10로 하되,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금액을 다르게 매기는 법이었다. 농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자는 취지에서 도입한 법이었다.
그런데 손실답험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풍흉 정도에 관한 판단이 조사관에 일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조사관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서, “손실 조사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따라 이루어져, 세금을 올리고 내리는 일이 조사관의 손에서 결정되면 백성이 피해를 보게 된다.”(<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6일)는 문제가 있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세금은 백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즉위 초부터 손실답험법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여겼고, 손실답험법을 대체할 조세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백성의 부담을 줄이면서 조사관의 횡포를 배제할 수 있는 조세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법이었다.
공법은 논밭에 일정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법이다. 일정액의 세금을 부과하니 조사관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액을 얼마로 할 것인지에 관한 객관적 기준이 문제였다. 그래서 세종은 공법을 대안으로 생각했으나 확신하지는 못했다.
공법은 비록 하나라의 책에 기재되어 있고 주나라의 향과 수 지방에서 실시되었지만,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하여 세금 부과의 기준으로 삼아서 결과가 좋지 못하였다고 한다. 공법을 실행하면서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6일)
세종9년(1427년) 과거시험 때 세종이 직접 낸 문제이다. 공법은 중국 하나라의 책에 실려 있다고 했다. 하나라는 전설 속 나라이니 공법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주나라 때 향과 수라는 작은 지방에서 실시된 적이 있었다고 하니, 공법은 중국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된 적이 없는 법이다. 조선에서 공법을 시행한다면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이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세종은 적정한 세금 부과를 성패의 관건으로 보았던 것 같다. 주나라의 향과 수 지방에서 실시된 공법의 결과가 좋지 못한 이유를 잘못된 세금 부과의 기준에서 찾았다. 그래서 과거시험생들에게 적정한 세금 부과의 기준을 물었다. 시험생들이 무엇이라 답변했는지 알 수는 없다.
세종12년, 호조에서는 ‘1결당 세금 10두’를 적정한 세액으로 제시했다. 세종은 상고해볼 만한 자료가 없었다. 실제 농사를 지으며 세금을 내는 농민들에게 호조의 의견이 적정한지를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17만여 명에 달하는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여론조사 결과, 호조의 의견에 찬성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 등의 의견을 따르라고 했다. 황희 등은 “대체로 비옥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자는 부유한 사람들이고, 척박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므로, 만약 호조에서 건의한 공법을 시행한다면 부자에게는 행복한 일이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0일)라고 주장하며 공법에 반대했다. 황희 등의 지적은 세종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보여주는 극단적 의견 차이가 황희 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세종은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여겨 공법 시행을 보류했다.
그러나 세종은 공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손실답험법의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세상일에 통달하지 못해 선조의 법을 경솔히 고칠 수 없었던 까닭에 공법을 지금까지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손실답험의 폐단이 심각하니 1, 2년 동안 공법을 시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 2월 23일)
세종18년(1436년), 세종은 공법을 다시 추진했다. 공법상정소를 설치하며 준비한 끝에 세종20년(1438년)에 비로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공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공법이 시행되자 미비점이 드러났고, 그것을 보완하여 세종26년(1444년) 11월 13일에 공법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세종9년에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지 17년 만이었다.
확정된 공법의 주요 내용은 전분 6등급, 연분 9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전분 6등급이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것이다. 비옥도가 가장 낮은 전분 6등급 토지의 1결당 수확량을 20석으로 하고, 한 등급이 올라갈수록 수확량이 12석 늘어나는 것으로 정했다. 그래서 전분 1등급 토지의 1결당 수확량은 80석으로, 전분 6등급 토지의 수확량보다 4배 많았다.
연분 9등급이란 풍흉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눈 것이었다. 풍년은 상상년, 상중년, 상하년, 중간 정도의 풍년은 중상년, 중중년, 중하년, 그리고 흉년은 하상년, 하중년, 하하년 등으로 나누고,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다르게 했다.
공법이 최종 확정되었으나 전면적인 시행이 되지 않았다. 관리들의 반대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세종28년(1446년) 6월 18일에 올린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의 상소가 대표적이었다. 이계전은 상소에서 “공법은 우리나라의 논밭에 적용하기 불편하므로 항목이 매우 상세하나 백성을 병들게 합니다.”라며, “공법을 시행한 지역의 백성들이 원망하니 어찌 오랫동안 시행할 수 있는 법이겠습니까.”(<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6월 18일)
라고 했다.
이계전이 상소를 올린 날, 세종은 이계전을 비롯하여 집현전 응교 어효첨, 예조 판서 정인지, 도승지 황수신을 불러 새벽까지 토론하였다. 세종은 공법 도입의 취지를 말하며 설득했지만 이계전 등은 수긍하지 않았다. 세종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찌 공법에 폐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다만 손실답험법의 폐단이 크므로 자손을 위하는 계책으로 공법을 시행한 것이니, 공법을 중단하라는 요청을 따르지 않고 불러서 내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오히려 내 마음에 그리 맞지는 않으니 마땅히 다시 생각하겠다.(<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6월 18일)
이미 시행했으니 중단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전라도와 경상도 이외의 지역으로 공법 시행을 확대하지도 않았다. 공법은 전분 6등급, 연분 9등급에 따라 세액을 정하므로 무려 54가지의 경우를 따져 보아야 했다. 지나치게 나누어놓아 백성들에게 불편했다. 백성들이 원망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마땅했다.
세종은 손실답험법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했다. 세종의 말을 들어보자.
손실을 답험하는 조사관 중에는 용렬하고 법의 근본 취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허실을 요망스럽게 헤아리거나 사정을 봐주며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그러니 백성들은 검사관을 접대할 수밖에 없었고, 검사관은 논밭의 두둑에 함부로 급히 다니고 백성들을 귀찮게 했다.(<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7월 9일)
그래서 세종은 공법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법은 역사상 시행된 적이 없는 법이니 도입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의견 수렴을 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했다. 17만 명이 넘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유였고, 법 제정까지 17년이 걸린 이유였다. 그리고 법을 제정하고도 전면적 시행을 미룬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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