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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는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인데,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으로 나누어 합해야 글자가 되었다.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략하나 전환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 102, 세종 251230일)

 

세종251230일의 기사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훈민정음에 관해 상당히 많은 내용이 담겨 있으니, 구절구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달에 만들었다.”고 했다. 훈민정음을 한 달 만에 만들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그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문이다. “임금이 친히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임금이 한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종이 주도했고 몇몇 벼슬아치들이 참여했다. 다음을 보자.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령하여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세자와 진양대군(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에게 그 일을 관장하게 했다. 모두 것을 임금에게 보고하게 했고, 거듭 상을 내려 주는 등 처우를 넉넉하게 했다.( <세종실록> 103, 세종 26216일)

 

훈민정음을 만든 지 두 달 후의 일이다. 번역 작업에 참여하려면 당연히 훈민정음에 정통해야 한다. 따라서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을 통해,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두 가지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집현전의 하급 학자들이 참여했다. 집현전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옛 제도나 문헌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대다수 벼슬아치는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옛 제도나 문헌을 연구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세자와 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 등 세종의 세 아들이 참여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왕실의 사업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세종은 굳이 의정부나 육조 또는 대간 같은 정부 벼슬아치들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훈민정음은 옛글을 모방한 것이라고 했는데,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를 보면 훈민정음이 독창적 문자임을 알 수 있다.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뜬 것을 기본으로 하여 변형하고, 모음은 천() () ()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은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으로 나누어 합해야 글자가 되었다.”라고 한 부분이 중요하다. 우리말은 음절 구성이 매우 복잡하다. ‘기관이란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자음+모음으로 구성되나, ‘자음+모음+자음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우리말의 음절 수는 다른 나라의 말보다 많다.

만약 하나의 음절을 하나의 문자로 나타내고자 한다면 3천 개 이상의 문자가 필요하다. 그 많은 문자를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세종은 초성, 중성, 종성을 구분함으로써 단 28개의 문자만으로 우리말을 표기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훈민정음의 탁월함이다.

훈민정음은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 모두 쓸 수 있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문자는 한자를 말하고, ‘이어는 우리말을 가리킨다. 어떤 것이든 훈민정음으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조판서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라고 했다. ‘훈민정음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말이다. 훈민은 세종이 특히 중시한 이념이다. 훈민은 백성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가르쳐서 바르게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가 필요하다.

세종이 집현전 응교 정창손에게 한 말을 보자.

 

내가 만일 언문(諺文)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배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 지어 나올 것이다.( <세종실록> 103, 세종 26220일)

 

훈민정음을 창제 당시부터 언문이라고 했다. ‘()’속된 말이라는 뜻이니, 언문이란 한문을 모르는 하층민이 사용하는 글이라는 의미이다. 그 언문으로 번역하면 <삼강행실>을 누구나 읽을 수 있다. 백성들이 스스로 읽어 깨우치면 충신, 효자, 열녀가 무리 지어 나와 이상적인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을 가르쳐야 하고, 백성이 이해할 수 있는 글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배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며 반대했다. 사람의 행동은 자질에 달려 있기에, <삼강행실>을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훈민정음으로 번역까지 해가며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창손의 태도를 두고, 세종은 용렬한 선비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3년 후에 한발 더 나아갔다. 그때 훈민정음이 공식적으로 반포되었는데, 세종은 직접 쓴 <훈민정음>에서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세종실록> 113, 세종 28929일)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창제 이유라고 했다. 그러자면 백성들이 쉽게 익혀 편히 쓸 수 있어야 한다. 정인지는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라며, 훈민정음을 쉽게 익힐 수 있다고 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불만이나 억울한 사연만큼 표현하고 싶은 말도 없을 것이다. 세종은 그런 것들을 표현하라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했다. 훈민정음에는 훈민과 아울러 애민(愛民)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세종이 오늘날과 같은 언론의 자유를 말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으면 표현하게 된다. 훈민정음이 공식적으로 반포된 지 3년 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 위에다 쓰기를, “하 정승아, 또 나랏일을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26, 세종 31105일)

 

하연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어떤 사람이 훈민정음으로 벽서를 써서 비판했다는 것이다. 누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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