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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다(1446324)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가 수양대군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52살이었다. 평소 몸이 좋지 않았던 소헌왕후는 310일에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였다. 세종은 승려들을 모아 밤새 기도를 드리게 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죄인들을 사면하는 등 부인의 회복을 기원했다. 세자와 대군들은 산천, 신사, 불우에 기도하는가 하면, 승려들의 밤샘 기도 때 팔에 불을 붙여 태우며 어머니의 회복을 빌었다. 이런 가족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소헌왕후는 상태가 악화한 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과 그 부인 순흥 안 씨의 첫 딸이었다. 14살 때 당시 충녕군과 결혼했고, 10년 뒤 남편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세종과 사이에 8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3자녀가 소헌왕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0살 때, 첫째 딸 정소 공주가 사망했다. 공주의 나이 불과 13살이었다. 50살 때,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사망한 데 이어, 불과 한 달 뒤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이 사망했다. 두 대군의 죽음이 소헌왕후에게 심적인 충격을 주어 건강이 악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소헌왕후는 어떤 인물일까? 조선 시대에 왕비는 왕에 가려 그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개 왕비는 궁궐 안의 여성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왕비의 능력에 따라서는 왕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소헌왕후의 활약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먼저, 세종 재위 8년에 한양에서 일어났던 대화재 때의 사례를 보자.

 

중궁(中宮)은 불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남아 있는 모든 대신과 백관에게, “화재가 일어났다 하니,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구제할 수 없게 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하여 구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저녁 대신 등이 대궐에 나아가 화재에 대한 상황을 보고하니, 중궁은 오늘의 재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나, 종묘가 보전된 것만이라도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31, 세종 8215일)

 

불이 났을 당시 세종은 강원도에서 강무(講武)하고 있었다. 강무는 사냥을 이용한 군사훈련을 말한다. 불이 나자 소헌왕후는 즉각 종묘의 보전을 지시했다. 큰 변고로 인해 혼란스러울 때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헌왕후는 세종을 대신하여 그런 역할을 했다.

세종은 소헌왕후의 그런 능력을 신뢰했던 것 같다. 재위 16년에 강무를 앞두고 병조에 명령하기를, “밤에 궁궐 문을 여닫는 것은 중궁의 명령에 따르라.”(<세종실록> 63, 세종 16115일)라고 했다. 또 재위 21년에도 강무로 궁궐을 비우게 되자 병조에, “긴급한 일이 있으면 나에게 달려와 아뢰지 말고, 중궁의 명령을 들어 시행하라.”(<세종실록> 84, 세종 21년 윤221일)라고 명령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매년 동짓날에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는 행사가 있었다. 신하들은 왕비에게도 별도로 축하 인사를 했다. 왕비는 인사받는 것으로 끝내는 게 관례였는데, 소헌왕후는 신하들에게 동짓날의 경사를 여러분들과 함께한다.”(<세종실록> 58, 세종 141120일)라고 답사를 했다. 왕비가 신하들의 축하 인사에 답사하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 나이든 여성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일이었다. 세종은 매년 80살 이상의 노인들을 궁궐로 초청하여 위로연을 베풀었다. 벼슬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노인이 초청되었는데, 여성들을 위한 잔치는 소헌왕후가 주최하였다.

 

중궁이 사정전에서 80살 이상의 여성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2품 이상으로 작고한 도순문사 경의의 부인 곽씨 등 14인은 사정전 안의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앉았고, 4품 이상의 부인 30명과 9품 이상의 부인 66, 그리고 공노비와 사노비 여성 118명은 좌우의 행랑과 뜰에 나누어 앉았다.(<세종실록> 57, 세종 14828일)

 

중궁이 사정전에 나아가 양로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대부의 아내로부터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362인이었다.

(<세종실록> 61, 세종 15년 윤86일)

 

이상의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소헌왕후가 궁중 안 여성들을 관리하는 역할만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헌왕후가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소헌왕후의 죽음은 세종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일까. 세종은 불교를 통해 소헌왕후를 추모하고자 했다. 경전을 만들고 추모 법회를 열며 불당을 세우려고 했다. 유교를 내세운 나라에서 임금이 불교에 관한 것을 주도하니, 당연히 벼슬아치들의 반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소헌왕후가 죽은 이틀 후,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이 어머니를 위해 불경을 만들겠다는 것을 승인했다. 세자와 대군들을 내세웠지만 기실 세종이 추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집현전 학사들이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은 고금의 사리를 통달하여 불교를 배척하니 현명한 신하라 할 수 있지만, 나는 의리는 알지 못하고 불법만을 존중하여 믿으니 무지한 임금이라 할 수 있겠다.”(<세종실록> 111, 세종 28328일)라며 냉소적인 말로 무시해버렸다.

불경이 완성된 후 추모 법회를 열려고 하자 벼슬아치들이 반대했다. 이에 세종은 지금 대소 신료가 모두 현명하여 정도를 걷는데, 나만 홀로 불교를 믿어 마음이 부끄러우니 대답할 말이 없을 뿐이다.”(<세종실록> 114, 세종 28106일)라며 반대를 물리쳤다.

소헌왕후가 죽고 2년 후, 세종은 불당 설치를 명령했다.

 

문소전 서북쪽 빈 땅에 불당 하나를 짓고 일곱 명의 중이 지키게 하려고 하는데, 그 크기는 주 건물이 한 간, 동서의 낭사가 각각 세 간, 부엌이 세 간이다.( <세종실록> 121, 세종 30717일)

 

문소전 서북쪽 빈 땅에 작은 불당 하나를 지으라고 했다. 문소전은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문소전을 지을 때 문소전 옆에 불당을 함께 지었는데, 문소전을 옮기면서 불당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는 게 세종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명분을 받아들일 벼슬아치들은 없었다. 있는 불당도 없애야 할 판에 없앤 불당을 다시 짓겠다니! 벼슬아치들의 반대는 격렬했다. 세종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정인지조차 이렇게 말했다.

 

전하가 나랏일을 모두 대신들과 의논한 후에 시행하셨는데, 불교에 관해서는 매번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니, 흥망에 관계되고 이해가 지극히 절실한 일이라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시려 하면서도 불교가 무슨 긴요한 일이기에 강행하시려 하십니까.(<세종실록> 121, 세종 30719일)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 등에게, “너희는 정도를 걷는 사람들이다. 만약 어진 임금이라면 마땅히 너희가 한 말을 좇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질지 못하니 끝내 너희의 말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세종실록> 121, 세종 3082일)라고 한 것에서 세종의 의지를 알 수 있다.

벼슬아치들의 반대는 확산되었다. 소장 벼슬아치들인 대간과 집현전을 비롯하여 의정부, 육조 등 대소 문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행동에 돌입하여 사표를 내고 집으로 가버렸고, 반대 분위기가 성균관에도 확산되어 성균관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세종은 궁궐을 떠나 임영대군의 집으로 가버렸다. 세종의 행동에는 임금 자리를 세자에게 넘길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 벼슬아치들은 그런 사태를 염려하여 불당 설치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실록>을 편집한 사관은 불당 설치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잘못 때문이라고 했다.

 

임금이 만년에 병으로 대신과 접견하지 못하였는데,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달아 죽고 소헌왕후가 승하하니, 임금이 마음을 둘 데 없었다. 이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사설(邪說)에 현혹되어 궁궐 옆에 불당을 설치하고자 하니, 모든 신료가 극진히 간하였나 돌이키지 못하여 임금의 덕에 누를 끼쳤으니, 이것은 실로 두 대군이 임금을 잘못 이끈 허물이었다.

(<세종실록> 121, 세종 3085일)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잘못을 거론한 이유는 노골적으로 세종의 잘못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일 뿐이다. 불당 설치는 명백히 세종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고, 세종은 어려서부터 유교 교양을 익힌 사람이다. 그런데 왜 세종은 불당 설치를 추진했을까? 세종은 말년에 건강이 나빠져 비관할 정도였다. 또 두 아들이 잇달아 죽고 부인이 사망하는 등 가정의 불행을 겪었다. 이런 신병과 불행으로 인해 세종은 인생무상을 느꼈고, 불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당 설치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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