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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를 기전체로 편찬하라고 하다(144925)

 

신하들이 <고려사>를 새로 편찬하기 위한 토론을 벌였다. 신석조, 최항, 박팽년, 하위지 등은 서술 체제를 바꾸자고 했다.

 

역대 역사가들의 사례처럼 기(), (), (), () 등을 남김없이 갖추어 쓴 뒤, 이에 맞춰 이미 편찬한 편년(編年)을 다시 깎고 보태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서 본사(本史)와 아울러 전하게 하면, 옛사람이 역사를 쓰는 방법에 거의 유사할 것입니다.(세종실록 123, 세종 3125일)

 

, , , 지를 모두 갖춘 <고려사>를 편찬하자고 했다. 기는 임금의 역사이고, 전은 신하나 특출한 인물의 전기를 말한다. 표는 연표이고, 지는 제도나 지리 등을 다룬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갖춘 역사 서술 체제를 기전체라고 한다. 신석조 등은 기전체로 <고려사>를 새롭게 편찬하자고 했다.

편년이란 역사적 사실을 연, , 일 순으로 쓰는 서술 체제를 말한다. 당시 <고려사>가 그 편년체로 편찬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효첨, 김계희, 이물민, 김명중 등은 이미 발간된 <고려사>를 보완하는 정도에서 새로 편찬하자고 했다.

 

이미 편찬한 <고려사>을 다시 교정하여 배부하고, , , , 지의 저작을 편찬해야 한다면 후일을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세종실록 123, 세종 3125일)

 

어효첨 등이 기전체 서술에 반대한 이유는 내용 부실이었다. , , , 지를 모두 갖출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전체와 편년체는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두 가지 서술 체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를 들면, <삼국사기>는 기전체 서술 체제이고 <삼국유사>는 편년체 서술 체제였다. 세종은 기전체로 <고려사>를 편찬하라고 했다.

조선 시대에 <고려사>가 여러 번 편찬되었다. 태조 재위 4(1395), 판삼사사 정도전과 정당문학 정총이 편찬한 <고려사>가 최초였다. 정도전과 정총은 편년체로 <고려사> 37권을 편찬했다.

그런데 태종은 “<고려사> 말기를 보니, 태조의 사실이 자못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에서 다시 편찬하라고 했다. 태종이 사실의 잘못을 이유로 들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정도전과 정치적 관계였다. 정도전과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였기에 정도전이 지은 <고려사>를 고치고자 했던 것이었다. 영춘추관사 하윤, 지관사 한상경, 동지관사 변계량이 편찬 작업을 맡았는데, 하윤이 사망하자 중단되었다.

세종은 태종의 뜻을 이어받아, 예문관 대제학 유관, 의정부 참찬 변계량 등에게 명령하여,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를 고치게 했다. 유관과 변계량은 1년여를 작업하여 세종 재위 3130일에 <고려사> 개편을 끝마쳤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려사> 개편 작업이 끝난 게 아니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개편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고려사>를 거듭 고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만세의 귀감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 이전 왕조의 흥망성쇠를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역사를 매우 중요시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것도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세종은 재위 5년에 <고려사>를 다시 수정하게 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이번 수정 작업에는 세종의 뜻이 담겼다. 세종이 문제 삼은 부분은 임금의 호칭이었다.

정도전 등이 처음 <고려사>를 지을 때 고려 임금의 호칭에 조()와 종()을 붙인 것은 참람한 일이라며 삭제했다. 조와 종은 중국 황제에게 붙이는 호칭이니 감히 고려 임금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조는 태왕, 혜종은 혜왕과 같은 식으로 썼다. 역사 서술에서 일종의 사대주의였다.

세종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 이미 임금에게 조와 종을 붙였으니 그대로 호칭을 기록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춘추관 지관사 변계량이 이미 고친 바 있는 참람한 일을 다시 쓴다면, 지금 사관들이 반드시 본받을 것이니 타당하지 않다.”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지금의 사관이 본받아 쓴다는 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쓴다는 말이니 무엇이 해롭겠는가.”(<세종실록> 22, 세종 51229일)라며 조와 종을 다시 쓰라고 했다.

이렇듯 세종을 역사 서술에서 사대주의를 탈피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조선 임금의 호칭과 연관된다. 고려의 임금에서 조와 종을 삭제한다면 조선의 임금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변계량이 지금의 사관이 본받을 것이라며 반대한 것에 대해, 오히려 지금의 사관이 본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조선 임금의 호칭에 조와 종을 포함하여 기록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후로도 <고려사>의 내용을 보충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세종 재위 24년에 신개와 권제가 내용을 보충한 <고려사>를 올렸고, 재위 28년에는 이계전, 어효첨에게 재차 <고려사>를 보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재위 31년에도 춘추관에 보완 작업을 명령했다.

<고려사>의 내용이 계속 보완되면서 편년체 서술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려사>를 편년체로 서술해 왔는데, 내용이 늘어나면서 내용이 복잡해졌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날에 임금이 한 일, 신하가 한 일, 제도나 지리와 관련된 특이한 일 등등을 모두 기록한다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그 각각을 나누어 서술하는 기전체로 서술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전체로 서술하면 각각의 내용이 너무 빈약해지니 편년체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계속되었다. 두 주장을 듣고 세종은 기전체 서술로 결론을 내렸다. 기전체는 서술이 임금을 중심으로 신하, 제도, 지리 등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특징이 있다. 임금 중심의 역사 서술에 적합한 것이었다.

세종 시대에 기전체로 서술된 <고려사>는 완성되지 않았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재위 1825일에 기전체 <고려사>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리고 1년 뒤,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편년체 서술 체제로 <고려사절요>를 완성했다. 태조에서부터 세종까지 고려사가 여러 차례 지어졌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문종 때 완성된 <고려사><고려사절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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