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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尋牛)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소’는 잃어버린 참된 본성을 빗댄 말이니, 심우는 참된 본성을 깨우친다는 의미이다. 만해 한용운(1879년~1944년)은 성북동 산동네에 집을 짓고, 그 집의 이름을 심우장이라고 붙였다.
심우장은 단출하다. 마당 한가운데에 집 한 채가 있을 뿐이다. 집 크기는 앞면 4칸에 옆면에 1칸이 덧붙여져 총 5칸이다. 초가삼간보다 약간 규모가 큰 작은 집이다. 참된 본성을 깨우치는데 얼마나 넓은 공간이 필요하겠는가.
한용운은 시대를 거스르는 삶을 살았다. 문명 개화하자며 일본을 배우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횡행할 때, 한용운은 외세를 배척하자는 동학운동에 가담했다. 신문명, 신문화를 배우자며 많은 지식인이 일본으로 몰려갈 때, 한용운은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산속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왔을 때, 한용운은 불교가 요구하는 수행을 버리고 민족 독립운동에 전심전력했다.
기미독립선언문(1919년)을 발표할 때 한용운은 서명자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공약 3장을 쓰고,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라고 촉구했다.
한용운은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조선 시대의 김시습을 만났고, 김시습의 인생을 “그 뜻은 괴로웠고 그 마음은 비장했다”라고 요약했다. 자기 뜻과 마음을 김시습의 인생에 빗대 그렇게 표현했다.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하며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심우장에 가려면 ‘만해의 산책공원’에서 한용운의 동상과 시비를 먼저 만나야 한다. 한용운은 시비와 거리를 두고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시비를 외면하고 있다. 아마도 시비에 새겨진 <님의 침묵>을 자기 시가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님의 침묵>은 1연 10줄짜리 시다. 시비에 새겨진 <님의 침묵>은 4연짜리 시다. 한용운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만해의 산책공원’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야 심우장에 도착한다. 골목길에는 채색되거나 그림이 그려진 계단과 벽이 있고,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 옛날 한용운은 인적 드문 골목길을 오르며 무엇을 생각했고, 지금의 사람들은 그 골목길에 북적대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한용운은 광복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굶주림이었다. 한용운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호적조차 올리지 않았다. 일제가 지배하는 식민지에서 굶주림은 한용운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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