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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실학자 유형원(1622년~ 1673년)은 <동국여지지>에서 ‘관촉사(灌燭寺)’를 이렇게 소개했다.
반야산에 있다. 돌미륵이 있는데 높이가 54자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고려 광종 때에 반야산 기슭에서 큰 돌이 솟아 나와 승려 혜명이 조탁해서 불상을 만들었다.”라고 한다.
‘관촉사’는 중국의 승려 지안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처럼 미륵이 빛난다.”라고 말한 이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관촉의 촉(燭)은 촛불이지만, 관(灌)은 ‘물 붓다’는 뜻이니 이름의 유래와 맞지 않는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관촉사가 아니라 ‘관족사(灌足寺)’라고 했다. 발에 물을 부어주는 절이란 뜻이니, 한자의 의미만 놓고 보면 더 적절한 이름인 듯하다.
반야산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있는 산이다. 관촉사에는 ‘돌미륵’이 있다. 돌미륵은 돌로 만든 미륵보살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이름은 옛 이름과 의미는 같으나 부르거나 기억하기 어렵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이라고 부르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고, 대개 애칭인 ‘은진미륵’으로 부르거나 기억한다.
미륵은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이니 ‘구세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전환기나 어려운 시기에는 미륵 사상이 나타나 크게 유행했다. 한 예로, 후 삼국시대에 궁예는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며 통치하고 세력을 넓혔다. 특히, 왕조의 말기에는 백성들 사이에 미륵 사상이 유행했다. 백성들은 현재의 고난한 삶에서 구원해줄 미륵을 애타게 기다렸다.
관촉사 돌미륵이 유명한 이유는 크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돌미륵의 높이가 54자라고 했다. 1자가 대략 30cm이니 대략 16.2m라는 말이다. 실제 높이는 약 18m라고 한다. 고려 광종 때 반야산 기슭에서 큰 돌이 솟아 나오자, 승려 혜명이 조탁해서 거대한 돌미륵을 만들었다고 했다.
돌미륵에 얽힌 설화는 유형원의 기록보다 자세하다. 반야산 기슭에서 큰 돌이 솟아나자, 고려 정부에서 돌미륵을 만들기로 하고 혜명에게 맡겼다. 혜명은 100여 명의 장인과 함께 돌미륵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작업을 지휘한 혜명은 생몰 년도와 활동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승려이다. 고려 정부에서 돌미륵 조탁을 의뢰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하건대, 불상 조각을 잘했던 승려였던 듯하다.
돌미륵의 모습은 특이하다.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다. 몸과 비교해 머리와 손발이 상당히 큰 편이다.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寶冠, 보배로운 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눈, 코, 입으로 꽉 차 있다. 눈은 눈썹보다 길게 찢어졌고, 코는 넓적하며, 입술은 두껍다. 양 볼은 살이 찐 듯 부풀어 올랐고, 턱은 이중 턱이다.
돌미륵의 얼굴 모습에서 부처의 모습을 떠올릴 사람은 없을 듯하다. 오히려 돌미륵의 얼굴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세인의 얼굴 모습이다. 커다란 보관을 쓴 속세인. 광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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