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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비를 만난 정자

 

  망원정은 한강 변에 있으나 한강에서 접근하기 어렵다. 망원정과 한강 사이 고속화 도로인 강변북로가 놓여 있다. 지금의 망원정은 1989년에 복원되었다. 복원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강변북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망원정의 정면 출입구인 외삼문이 강변북로 쪽으로 나 있어 복원 당시 주변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제 외삼문으로는 출입할 수 없고, 망원정의 측면 출입구인 협문으로만 드나들 수 있다.

 

  망원정의 본래 이름은 희우정이다. 정자 안쪽에는 喜雨亭(희우정)’ 현판이 달려 있고, 바깥쪽에는 望遠亭(망원정)’ 현판이 달려 있다. 정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면 이전 이름은 잊히기 마련인데, 이전 이름에 얽힌 일화 역시 유명하여 두 개의 현판을 단 듯하다.

 

  정자 이름을 왜 희우정이라고 했을까?

 

    임금은 모화루 서편에 말을 세우고 격구를 구경한 뒤, 효령 대군 이보의 별장으로 갔다. 강 언덕 정자에 앉아 군사들이 포를 쏘고 말 타고 활 쏘는 모습을 관람하고 술잔치를 베풀었다. (중략) 이날 임금은 홍제원, 양철원에서 영서역 갈두 들판까지 말을 타고 천천히 거동했다. 거동하는 길가에 밀과 보리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고 임금은 몹시 기뻤다. 정자에서 막 잔치를 벌이려는데, 마침 큰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네 들에 물이 흡족했다. 임금은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세종실록>, 세종 7513)

정자 안쪽의 ‘희우정’ 현판

  임금은 세종이고, 효령 대군은 세종의 형이다. 이날 세종이 말을 타고 궁궐 밖을 나온 이유는 농사 걱정 때문이었다. 이때 가뭄이 심했는데, 홍제원(홍제동)에서 영서역(연신내)에 이르는 길가에는 밀과 보리가 무성했다. 세종은 기뻐하며 모화루로 갔다. 모화루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서대문에 있었다.

 

  모화루에서 격구를 구경한 세종은 마포에 있는 효령 대군의 별장으로 갔다. 효령 대군의 한강 변 정자에서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본 뒤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큰비가 내리니 세종은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 지었다. ‘기쁜 비를 만난 정자라는 의미였다.

 

멀리 볼 수 있는 정자

 

  정자 이름이 희우정에서 망원정으로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월산 대군 이정이 글을 올렸다.

    “효령 대군이 희우정을 신()에게 주었습니다. 신이 이름을 망원정이라 고치고 여러 번 어제(御製)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신이 감히 어제를 청하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에 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이정의 글을 승정원에 보여주며 물으니, 도승지 김종직 등이 아뢰었다.

    “가까운 사이의 일이니, 어제를 내릴지라도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임금이 망원정시와 아울러 서()를 지어 내렸다. (<성종실록>, 성종 151015)

 

정자 바깥쪽의 ‘망원정’ 현판. 정자의 측면 출입구인 협문에서 볼 수 있다.

  임금은 성종이고, 월산 대군은 성종의 형이다. 월산 대군은 세종의 증손자이니, 효령 대군이 정자를 물려줄 만했다. 효령 대군은 성종 13년에 사망했으니 말년에 정자를 물려준 듯하다. 월산 대군은 정자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꿨다. 세종이 희우정이라고 이름 지은 지 50여 년이 지난 때였다. 망원정이란 멀리 볼 수 있는 정자라는 의미였다. 희우정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이름인 데 반해, 망원정은 경치를 관람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월산 대군은 성종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임금(세종)이 지은 이름을 변경했으므로 임금(성종)에게 승인받으려는 의미였으리라. 성종은 여러 차례 대답하지 않았는데,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바꾸는 게 부담이었으리라. 성종은 승정원(비서실)에 물어봤고, 도승지(비서실장)가 문제없다고 답변하자 비로소 시와 글을 지어 내렸다.

 

형제의 정은 잊히고

 

  희우정이란 이름에는 세종과 효령 대군이 관련 있고, 망원정이란 이름에는 성종과 월산 대군이 관련 있다. 세종과 성종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군들인데, 형을 제치고 임금이 된 공통점이 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선택하여 임금이 되었고,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세종의 아들)가 선택하여 임금이 되었다. 세종은 자신이 임금이 된 일을 두고 부끄럽다라고 했다. 아마도 성종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을 듯하다.

 

  세종은 효령 대군에게 극진했고, 희우정에도 자주 갔다. 세종 32년 윤1월에도 도승지(비서실장) 이사철에게 명령하여, 희우정에서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라고 했다. 한 달 뒤 세종은 세상을 떠났다. 성종 또한 월산 대군에게 극진했고 망원정에 자주 갔다. 성종 20년 월산 대군이 세상을 떠난 후, 성종은 망원정에 가지 않았다.

 

  망원정(희우정)은 형제 사이의 정을 나누던 곳이다. 세종과 성종은 형들과 얼굴을 맞대고 미안한 감정을 풀었다. 망원동이란 동네 이름은 망원정에서 나왔다. 지금의 망원정은 망원동이 아니라 합정동에 있다. 세월이 흐르고 동네 이름도 바뀌면서 망원정(희우정)에 담긴 형제의 정도 잊힌 듯하다. 망원정에는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만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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