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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창경궁에 가게 됐다. 함께 간 사람 중에는, 중학생일 때 온 이후 처음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무려 30여 년만이다. 대학생일 때 자주 드나들었지만, 대학 졸업 이후에는 거의 와볼 기회가 없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창경궁은 위상이 애매한 궁궐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조선의 법궁이었고,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법궁이었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법궁으로 만든 궁궐이다. 창경궁은 법궁이 아니었다. 왕실의 어른을 모시고자 지은 궁궐이다.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려고, 1418년(세종 원년)에 지은 수강궁이 창경궁의 출발이다. 성종 때, 왕실의 어른이 많아졌다. 할머니인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의 부인 안순왕후, 어머니인 덕종의 부인 소혜왕후를 모셔야 했다.
성종은 수강궁을 확장해, 정전인 명정전과 업무 공간인 문정전 등을 짓고, 궁궐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지었다. 창경궁은 왕비들의 생활공간, 즉 여성들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그런 이유에서 건물이 궁궐의 격식을 엄격히 따르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弘化門)이다. 조선의 궁궐 정문에는 ‘화(化)’자가 들어간 이름을 붙였다.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이고,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홍화문은 넓히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무엇을 넓힌다는 말일까. 임금과 백성의 만남을 넓힌다는 뜻이다.
홍화문 앞에서 백성과 만남 기회를 넓힌 대표적인 임금은 영조였다. 영조는 백성을 만나 쌀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금주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인 조세제도인 균역법 시행 때는, 백성을 홍화문 앞에 불러 모아 여론을 청취했다.
홍화문을 지나 명정문을 지나면 명정전 앞마당에 이른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명정전 앞마당이 너무 좋다고 했다. 특별한 장치가 없는데도, 비가 오면 빗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땅속으로 스며드니, 신기하다고도 했다.
명정전 앞마당에는 ‘박석’을 깔았다. 박석은 얇고 넓적한 화강암을 말하는데, 궁궐에 사용한 박석은 주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광산에서 채취했다. 박석을 깔 때 박석 사이의 이음새가 물길 역할을 하게 설계하여, 물이 박석의 이음새를 흐르면서 속도가 줄어들게 했다.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빗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이유이다.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이다. 밝은 정치를 펴는 전당이라는 뜻이다. 명정전은 규모에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비교해 작으나,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해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광해군 8년(1616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정전을 지나면 빈양문이 나타나고, 빈양문을 열고 나오면 넓은 공터가 있고, 그 공터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함인정(涵仁亭)이다. 영조가 지은 <함인정에 붙이는 작은 글>에 따르면, ‘함인’이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인의(仁義)에 흠뻑 젖는다.”라는 뜻이다.
함인정은 창경궁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함인정에 앉아 사방을 보면 창경궁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임금은 함인정에서 신하들과 어울려 정치를 의논하고 연회를 열었다. 함인정 천장 아래에는 사방에 4개 시구를 현판에 새겨 걸었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 물은 사방 연못을 채우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여름 구름은 수많은 기이한 봉우리를 만든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더욱 빛나게 하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겨울 산봉우리는 외로운 소나무를 빼어나게 한다.
<사시(四時)>라는 시이다. 도연명이 지은 시라고 알려졌으나, 최근에 고개지가 지은 시라고 고증되었다. 봄 구절 현판은 동쪽, 여름 구절 현판은 남쪽, 가을 구절 현판은 서쪽, 겨울 구절 현판은 북쪽에 걸었다.
시인은 봄에는 물, 여름에는 구름, 가을에는 달, 겨울에는 산봉우리가 으뜸이라고 했다. 봄이다. 사람들은 새롭게 피어나는 꽃, 돋아나는 풀에서 생명의 약동을 느낀다. 시인은 생명의 근원인 물에 주목했다.
시인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머물지 말고, 근원에도 관심을 기울이라고 했다. 궁궐 정자에 <사시>를 붙여놓은 이유는 풍류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4계절을 두루 살피는 정치를 하자는 결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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