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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가야의 유물을 보니

은선재 2019. 12. 30. 13:25

가야의 유물을 보니

- <가야본성, 칼과 현>, 국립중앙박물관, 2019123~202031

 

얼마 전에 경상남도 창녕군 교동에 위치한 비화가야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공개되었다. 5세기 중 후반에 조성된 무덤이라고 하니 무려 1,500년이 넘은 무덤이다. 이 무덤이 공개되면서 가야가 새삼 주목을 받았고, <가야본성, 칼과 현>이란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다.

가야하면 생각나는 게 <구지가(龜旨歌)>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는다면,

구워 먹겠다!

 

아홉 마을의 대표들이 춤추며 불렀다는 노래이다. 대표들이 노래를 부르자 하늘에서 바구니가 내려왔다고 한다. 바구니 안에는 여섯 개의 알이 있었는데, 12일이 지나자 여섯 아이가 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여섯 아이는 키가 아홉 자나 될 정도로 성장했다. 그 아이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김수로가 가락국의 임금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아이 또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따라서 가야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다. 가락국(금관가야), 아락국(아라가야), 가락국(대가야), 고자국(소가야), 비사벌국(비화가야), 다락국 등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수로가 임금으로 즉위한 곳은 경상남도 김해에 있었던 금관가야였고, 이번에 지도자의 무덤이 공개된 비화가야는 경상남도 창녕에 위치해 있었다.

 

여러 '가야'의 위치와 각 가야의 토기 모양. 토기 모양의 차이를 통해 각 가야에서 사람들의 생활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지가>와 비슷한 노래를 신라 사람들도 불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 부인 내놓아라.

남의 부인 납치한 죄 몹시 크구나.

네가 만약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먹겠다.

 

신라 제33대 임금 성덕왕(재위 701~737) , 어떤 마을의 사람들이 불렀다는 <해가(海歌)>이다. 수로 부인을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고 했다. 순정공이 강릉 태수가 되어 강릉으로 가던 중, 부인인 수로가 바다용에게 납치되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모아 노래를 부르면서 막대기로 바닷가를 치면 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노인의 말대로 하자,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고 한다.

가야에서 불렸던 노래가 신라에도 전파되었다고 할 것이다. 두 노래가 의도하는 바도 비슷하다. <구지가><해가>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북이를 구워 먹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소원을 빌면서도 신을 협박했다. 마침내 뜻을 이루었으니, 일방적으로 신에게 의지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가야의 건국신화에는 김수로 외에도 두 명의 인물이 더 등장한다. 먼저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있다. 아유타국은 인도에 있었던 나라라고 한다. 허황옥은 부모님의 얘기를 듣고 가락국에 와서 김수로와 결혼했다.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 때, 바다신의 노여움으로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배에 탑을 실어 바다신의 노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 탑을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배의 균형 유지를 위해 밑바닥에 실었던 돌에 석탑이란 의미를 부여한 것이리라

파사석탑

다음으로 완화국 왕자, 탈해가 등장한다. 탈해는 김수로와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 가야국에 와서 임금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 그래서 김수로는 술법을 겨루어 탈해를 쫓아냈다.

김수로, 허황옥, 탈해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곳에서 가야로 왔다는 것이다. 김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왔다. 허황옥과 탈해는 바다 건너왔다. 가야의 건국신화는 가야가 국제 교류지였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가야가 이주민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것도 시사한다.

 

집 모양 토기. 톡특한 집 모 양을 통해 가야인 중 이주민 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 다.

가야는 번창했다. 그 원동력은 철기산업이었다. 당시 철기산업은 최첨단 산업이었다. 가야로 이주해온 집단 중에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가야는 철 수출국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일본의 철제갑옷이 가야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철기산업이 발전하면서 가야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철기를 만들 때 사용했던 도구들

 

철갑옷을 입은 병사 모양의 토기

 

그러나 가야는 10번째 임금 구형왕 때 신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신라 진흥왕 23, 562). 구형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어서 항복했다. 구형왕의 증손자가 김유신이다.

가야가 신라에 패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탈해는 김수로에게 패배한 뒤 신라로 가서 임금이 되었다. 그 뒤를 이은 파사왕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김수로를 초청하여 의견을 들었다. 그런데 김수로는 신라의 접대가 소홀하다며 한지부의 책임자인 보제를 죽이고 돌아가기도 했다. 초기에는 가야가 신라보다 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가야가 신라에 패배한 이유를 비화가야의 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비화가야 무덤에는 순장의 흔적이 나타난다. 순장이란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신하나 하인들을 함께 매장하던 풍습을 말한다. 이 풍습은 지배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오로지 부리는 대상으로만 보았을 뿐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지배층이 정치를 하던 시대가 고대이다. 비화가야의 무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야 무덤에는 순장의 흔적이 나타난다. 고령 지산동에서 발견된 왕의 무덤에서는 무려 35명을 순장한 방이 발견되기도 했다. 가야는 고대국가였다

 

가야의 무덤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 가야인의 무덤에는 순장의 흔적이 나타난다. 

반면 신라에서는 지증왕 3(502)에 순장을 금지했다. 그 뒤를 이은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혁신을 이룩했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런 인간의 목숨을 피지배층이라 하여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 신라는 지증왕과 법흥왕 시대를 거치며 중세국가로 성장했다. 가야를 멸망시킨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들이다. 고대인이 중세인을 이길 수 없다. 가야가 신라에게 패망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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