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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연재3) 시-한국사

통일신라3

은선재 2021. 1. 7. 14:03

통일신라의 사람들

 

설총

  설총은 제31대 임금 신문왕 때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원효 대사이고, 어머니는 요석 공주이다.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책에 통달했다고 한다.

  설총은 구결(口訣)을 창안했다.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시하는 방법에는 향찰과 구결이 있었다. 향찰은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주로 향가를 짓는 데 이용되었다. 반면 구결은 한문을 읽을 때 뜻을 이해하기 쉽게 달아 쓰던 토를 말한다. 한문 문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그런 방법은 후대에도 한문 문장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니, 오랫동안 설총의 덕을 본 셈이다.

  원효 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유해를 잘게 부수어 원효의 얼굴 소상을 빚고 분황사에 모셨다고 한다. 설총이 슬퍼하며 예를 올리자 갑자기 얼굴 소상이 뒤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원효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아들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설총은 글을 잘 지어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신문왕에게 들려주었다는 얘기만이 전해진다.

 

  옛날 화왕이 처음으로 오자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습니다. 봄철이 되자 예쁜 꽃이 피어 여느 꽃보다 유난히 아름다웠습니다. 가까운 곳에서든 먼 곳에서든 온갖 꽃들이 화왕을 만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때 한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붉은 얼굴에 백옥 같은 이를 가졌고, 깨끗한 옷으로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맵시 있는 걸음으로 화왕 앞으로 걸어와 말했습니다.

  “저는 새하얀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은 맑은 바다를 대하며, 봄비에 목욕하여 더러운 때를 씻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습니다. 저의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임금님께서 높은 덕을 지니셨음을 듣고, 향기로운 침소에서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그때 한 사나이가 베옷에 가죽 허리띠를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 사나이는 백발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피로에 지친 걸음으로 다가와 화왕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서울 밖 길가에 사는데, 아래로는 아득한 들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우뚝 솟아 삐죽삐죽한 산의 경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름은 백두옹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임금님께서는 좌우에 온갖 물건을 넉넉하게 공급받아 기름진 쌀과 고기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있지만, 상자 속에 원기를 도울 좋은 약과 독기를 제거할 약이 있어야 합니다. 비단신이 있더라도 짚신을 버리지 아니하여 모자라는 것에 대비해야 하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왕에게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를 묻자, 화왕이 말했습니다.

  “사나이의 말이 도리에 맞지만 아름다운 사람을 얻기도 어려우니 어찌해야 할까?”

  사나이가 다시 나서서 말했습니다.

  “저는 임금님께서 총명하다는 말을 듣고 올바른 도리를 알리라 생각하여 찾아왔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릇 임금님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두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맹자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풍당도 빛을 보지 못하고 늙었습니다.”

  그제야 화왕은 깨닫고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설총을 다루면서 소개한 화왕계이다. 풍당은 중국 한나라 때 사람으로 임금에게 정직한 말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우언이라고 한다. 우언이란 사물에 빗대어 의견이나 교훈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다.

  설총은 화왕(=모란), 장미, 백두옹(할미꽃)에 빗대어 임금의 도리를 말했다. 신문왕은 설총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의 우언은 참으로 뜻이 깊으니, 이를 기록하여 임금을 경계하는 말로 삼을 수 있게 하라.”고 하면서, 설총의 벼슬도 올려주었다.

  신문왕은 문무왕에 이어 삼국통일로 넓어진 나라의 면모를 갖추는 데 주력했다.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5개의 도시를 설치하는 등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했다. 넓어진 영토와 많아진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데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치했다.

  국학의 교육 대상은 주로 6두품이었다. 설총은 국학의 설치와 교육에 큰 역할을 했다. 설총은 어머니가 공주였으나 아버지가 6두품이므로 6두품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왕은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의 강화를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신문왕 이후 행정이 효율화하고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신라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월명사

 

  생사길이 여기 있으니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는구나.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서 나도 가는 곳 모르겠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제35대 임금 경덕왕 때 월명사가 지은 향가로, 제목은 제망매가이다. 죽은 누이의 제사를 지내며 부른 노래라는 의미이다. 첫 두 줄에서 누이의 죽음을 말했다. 누이는 생사의 길에서 머뭇거리다, 간다는 말도 하지 혼수상태에 빠져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났다는 얘기이다.

  다음 두 줄에서는 누이와 자신의 관계를 말했다. 누이와 자신은 한 가지에서 태어난 잎과 같지만, 서로 가는 곳은 모른다고 했다. 이승에서는 함께 지낸 형제이지만, 저승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마지막 줄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원했다. 미타찰은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를 말한다. 누이는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누이를 만나려면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저절로 갈 수는 없다. 미타찰에 가려면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러하니 도를 닦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누이와 사별을 실감할 수 있게 그린 명편이다. 월명사가 누이의 제사를 지내며 향가를 짓자 회오리바람이 불어 종이돈을 서쪽으로 날렸다고 한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가는 누이에게 종이돈이 날아갔다. 종이돈은 극락세계로 갈 때 노잣돈으로 쓰라는 의미에서 장례식 때 쓰는 가짜 돈을 말한다.

  월명사는 경상북도 경주에 있었던 사천왕사에 살았다고 한다. 피리를 잘 불어 달밤에 피리를 불며 큰길에 나가면, 달이 월명사를 위해 운행을 멈추었다고 한다. 여느 승려와 달리, 월명사는 국선의 무리였다. , 화랑 집단에 속한 승려였다.

  경덕왕 19(760),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타나 사라지지 않는 괴변이 일어나자, 경덕왕은 월명사에게 노래를 짓게 했다. 괴변을 물리칠 주술적인 노래를 지으라는 명령이었다. 월명사가 향가만 알 뿐 찬불가에는 익숙하지 못하다.”라고 하자, 경덕왕은 향가라도 지으라고 했다. 이에 월명사가 향가를 지었다.

 

  오늘 여기에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를 모시어라.

 

  제목은 도솔가이다. 도솔은 부처가 머물러 있는 세계를 말한다. 산화가는 꽃을 부처에게 바치며 부르는 노래이다. 부처에게 바치는 꽃을 향해 도솔에 머물러 있는 부처를 모셔오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월명사가 도솔가를 짓고 얼마 후 괴변이 사라졌다고 하니, ‘하나의 해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는 임금을 상징한다.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는 말은 임금에게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경덕왕에 이르러 김춘추계의 임금에 도전하는 내물왕계 진골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도솔가의 배경에는 그런 정치적 상황이 존재했다.

  경덕왕이 월명사에게 향가를 짓게 한 이유는, 화랑 집단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경덕왕은 화랑의 지지를 끌어냈으나, 정치적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화랑의 영향력이 약화했기 때문이다.

  월명사가 도솔가를 짓고 3년 뒤, 내물왕계의 진골 김양상이 시중이 되었다. 김양상은 훗날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을 죽이고 임금이 되었다. 그리하여 신문왕에서 경덕왕에 이르는 신라의 전성기는 끝났다. 대신 왕위를 두고 진골들이 골육상쟁을 벌이는 정치적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장보고

  장보고는 제42대 임금 흥덕왕 때부터 제46대 임금 문성왕 때까지 활동한 장수이다. 본명은 궁복인데,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고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장보고가 도량이 대단히 넓은 사람이라고 했다.

  장보고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창을 쓰는 기술이 뛰어났다. 당나라 양쯔강 하류의 서주 지방으로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여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다. 흥덕왕 3(828)에 귀국하여,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실상을 임금에게 보고하며 건의를 했다.

  “당나라를 돌아다녀 보니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진(지금의 완주)을 만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흥덕왕이 허락을 받아 장보고는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을 만들었다. 이후 당나라 해적을 막으면서 국제무역을 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당나라의 물건을 일본에 팔고, 일본의 상인들은 청해진을 거쳐 당나라로 가게 했다.

  당시 신라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흥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균정과 그의 아들 제륭이 임금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836). 이때 시중 김명은 제륭을 지원했고, 이찬 김우징은 균정을 지원했다. 양쪽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싸운 결과 김명 무리가 이겨 제륭이 즉위했고(43대 임금 희강왕), 패배한 김우징은 청해진으로 도망쳤다.

  희강왕 3(838), 이번에는 김명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즉위했다(44대 임금 민애왕). 이 소식을 들은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민애왕을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장보고는 5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임금으로 추대했다(45대 임금 신무왕).

  당연히 장보고의 위상도 높아졌다. 즉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신무왕이 죽자, 뒤를 이은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 장군으로 임명했다(839). 진해 장군은 진골만이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장보고의 위상이 높아지자 귀족들이 견제했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과 혼인하려 하자 귀족들이 반대했다.

  “장보고는 섬사람인데, 그의 딸이 어찌 왕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과 혼인을 없던 일로 해버렸다. 이에 반발하여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켰다(846). 신라의 정부는 염장이란 자에게 두둑한 보상을 약속하며 장보고의 제거를 부탁했고, 염장은 청해진을 찾아가 장보고를 암살했다.

  장보고는 반란에 실패했으나, 뒤이은 호족들의 반란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호족이란 지방의 지배자를 말한다. 호족 중에는 귀족 출신으로 조정으로부터 녹읍을 받아 호족이 된 자도 있고, 장보고처럼 평민 출신으로 재산을 모아 호족이 된 자도 있었다. 훗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재산을 모아 호족이 된 인물이었다.

  중앙정치가 문란해지자 기회를 엿보던 호족들이 잇따라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호족의 반란으로 신라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고, 각지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유민들이 규합한 소규모 민란이었지만, 점차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런 민란의 대표적 지도자가 견훤과 궁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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