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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연재3) 시-한국사

고구려3

은선재 2020. 10. 8. 16:33

고구려의 사람들

 

을불

을불은 고구려 제15대 임금 미천왕(재위 300~331)의 이름이다. 14대 임금 봉상왕(재위 292~300)의 동생인 돌고의 아들이다. 봉상왕은 돌고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을불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을불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다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었다. 그 과정을 보자.

 

을불은 처음에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했다. 음모는 을불이 누구인지 모르고 몹시 괴롭혔다. 그 집 옆에 풀이 무성한 연못이 있어 개구리가 울었다. 음모는 을불을 시켜 밤에 돌을 던져 개구리 우는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낮에는 나무를 하라고 들볶아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을불은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그 집을 나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을 팔았다.

하루는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강 동편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달라고 하여 한 말가량 주었는데, 다시 달라고 하여 주지 않았다. 노파는 앙심을 품고 자기 신발을 소금 속에 몰래 묻어두었다. 을불은 그런 줄도 모르고 소금 짐을 지고 길을 나섰는데, 노파가 따라와 을불이 자신의 신발을 훔쳤다며 압록 고을 원님에게 무고했다. 원님은 소금을 뺏어 신발값으로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곤장을 때린 후 놓아주었다. 그때 을불은 모습이 여위고 옷이 남루하여, 사람들은 을불이 왕손임을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국상 창조리가 임금을 몰아내려 결심하고, 북부의 조불, 동부의 소우 등을 보내 을불을 찾았다. 비류하 가에 이르러 살펴보니 한 사내가 배 위에 있는데, 얼굴은 야위었지만 몸가짐이 예사롭지 않았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여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임금이 포악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내쫓으려고 은밀히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생활 태도가 검소하고, 인자한 마음씨로 사람들을 사랑하므로 왕위를 이으실 수 있다고 하며, 저희를 보내 모시게 했습니다.”

을불이 의심하며 말했다.

나는 시골 사람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른 데 가서 찾으십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하가 왕손에게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을불을 받들고 돌아가자, 창조리가 몹시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어느 집에 모셔두고 아무도 모르게 했다. 가을 9월에 임금이 후산의 북쪽으로 사냥 갔을 때, 국상 창조리가 따라가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와 뜻이 같은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

갈댓잎을 관모에 꽂으니 신하들이 모두 다 꽂았다. 창조리는 신하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임금을 폐위하여 별실에 가두고 병사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리고 을불을 모셔다 옥새를 바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을불이 시련을 겪는 과정을 통해, 당시 백성들의 현실을 알 수 있다. 가진 자들의 횡포로 인해 민중은 시달리고 있었다. 음모는 자신만 편히 잠자기 위해 을불을 시켜 개구리 울음소리를 그치게 했다. 노파는 먹고살기 위해 을불을 무고하여 소금을 빼앗았다.

당시 여러 해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 되었다. 봉상왕은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기는커녕 궁궐을 화려하게 증축하기 위해 15세 이상의 남녀를 동원했다. 국상 창조리가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들어 중단을 요청하자, 봉상왕은 화를 내며 말했다.

백성은 임금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궁궐이 웅장하지 않으면 어찌 백성이 임금을 우러러보겠는가.”

백성들은 강제 동원을 피하려 도망쳤다. 도망은 백성이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의 한 방법이었다. 창조리를 비롯한 신하들은 백성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행동에 나섰다. 봉상왕 9(300) 봉상왕을 내쫓고, 을불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했다. 을불은 32년간 재위하며, 중국 한나라가 설치했던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을 몰아냈다.

 

온달

온달은 고구려 제25대 임금 평원왕(재위 559~590) 때의 장수이다. 온달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사실적 자료는 별로 없고, 온달 설화가 전해온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 사람이다. 모습이 꾀죄죄하나 마음은 맑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구걸하여 어머니를 모셨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헐어빠진 신발을 신은 채 마을을 오갔다. 당시 사람들은 바보 온달이라고 놀렸다.

평원왕은 딸이 자주 울자 장난삼아 말했다.

너는 늘 울기만 하여 시끄러우니, 대갓집이 아니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

공주가 16살이 되자, 평원왕은 상부 고 씨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자 공주가 말했다.

임금께서는 늘 너는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전과 다른 말씀을 하십니까? 예사 사내도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며 어찌 임금께서 그리하십니까.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임금께서 하신 명령은 잘못된 것이니 저는 받들 수 없습니다.”

평원왕이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니 너는 내 딸이 아니다! 어찌 같이 살겠느냐! 네 좋을 대로 해라!”

공주는 패물 수십 개를 팔에 차고 궁궐에서 나왔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물어 온달의 집으로 갔다. 눈멀고 늙은 어머니를 보고서 가까이 가서 절을 하고,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더러워 귀한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냄새를 맡으니 향내가 좋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군요. 분명 천하의 귀한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구의 꾐에 빠져 여기까지 왔습니까? 우리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느티나무 껍질을 벗기러 깊은 산 속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주는 집을 나와 산으로 가다, 느티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났다. 공주가 속마음을 말하자 온달은 화를 내며 말했다.

이것은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너는 사람이 아니고 여우일 것이다! 나를 괴롭히지 말라!”

온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공주는 온달의 집으로 와서 사립문 아래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공주는 집 안으로 들어가 모자에게 자세한 말을 했다. 온달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너무 더러워 귀한 사람의 배필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공주가 대답했다.

옛사람이 말하길, ‘한 말의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라도 마름질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맞으면 그만이지, 어찌 부귀해야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공주는 팔찌를 팔아 밭, , 노비, , 말을 사서 살림살이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설화이다. 온달이라는 실제 인물이 등장하지만,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허구이다.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허구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에는 하층민의 소망이 담겨 있다. 신분질서가 고착된 곳에서는 어디서든 하층민은 신분질서를 넘어보고자 하는 소망을 갖는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그런 소망의 표현이다.

설화의 마지막 부분은 감동적이다. 온달이 전쟁터에서 죽자 장례를 치르려는데, 여러 사람이 관을 들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은 이미 결정이 났으니 돌아가세요.”라고 하자 관을 운반할 수 있었다. 온달과 공주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결말이다.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온달은 중국 북주의 무제(재위 561~578)가 요동을 침략했을 때 참전하여 적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 19(608) 때에는 신라와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때 아차성(지금의 서울 광진구에 있었던 성이다)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라 오는 화살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온달이 세상을 떠난 4년 후, 수나라 양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후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에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런 국난의 시기에 온달 설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온달 설화는 하층민의 소망과 아울러 상하층이 화합하여 국난을 극복하자는 의미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제28대 보장왕 때 재상이다. 영양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세운 뒤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정치와 군사를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보장왕에게 말하길, “3교는 비유하면 세 솥발과 같으므로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아주 융성하지만,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를 갖춘 것이 아닙니다.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도교를 들여와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연개소문은 왜 도교를 도입하자고 했을까? 국내외적 상황을 고려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 보면 당시 불교가 몹시 성행했고, 귀족들이 불교와 유착되어 있었다. 연개소문은 귀족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교를 도입하고자 했다.

국제적으로 보면 당나라와 관계를 고려했다. 당나라 태종은 연개소문이 영양왕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침략하려 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복원하여 전쟁을 막기 위해 도교를 도입하고자 했다. 당나라의 황실은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황실과 같은 이 씨라고 하여, 도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연개소문은 그런 사정을 활용하고자 했다.

연개소문은 성공하지 못했다. 보장왕 4(645), 당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당나라 군대는 요동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사당을 파괴했다. 이로 인해 주몽의 어머니의 소상이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안시성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던 당 태종은 탄식했다. “위징이 살아 있다면 내가 이렇게 수고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위징은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며, 태종에게 위민 정치하라고 진언하던 인물이다. 태종은 위징의 진언을 듣지 않고 고구려를 침략한 게 무모했음을 인정했던 것이었다.

보장왕 8(649),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했다. 고종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대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했으나,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보장왕 25(666),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연개소문의 자식들은 권력 싸움에 몰두했다. 첫째 아들 남생이 연개소문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동생인 남건과 남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남생은 패배하여 당나라로 도망갔다. 2년 뒤, 당 고종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재차 공격했고, 고구려는 패배하여 멸망했다(668).

당 태종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했다 패배한 것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수 양제는 백성에게 잔혹했던 반면, 고구려의 임금은 백성을 사랑했다. 반란을 일으킬 생각에 사로잡혀 평화로운 곳을 공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전쟁에서 이기느냐 패배하느냐는 단지 군사력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다. 지배층과 백성이 얼마나 단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구려는 지배층과 백성의 단결로 20여 년에 걸친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지배층이 권력 다툼에 몰두하면서 백성과 단결이 무너졌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패망을 두고 말은 정당하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목할 때에는 큰 나라일지라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지만, 위정자가 나라에 의롭지 못하고 백성에서 어질지 못하여 원망을 사게 되면 나라가 무너져 스스로 기세를 떨치지 못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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