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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음이 적다
가을바람만이 괴롭게 불고,
온 세상에 지음(知音)은 적구나.
창밖은 한밤중인데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서 마음이 만리(萬里)를 향하는구나.
신라의 문신 최치원(857년~?)이 지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비 내리는 가을밤에 자신의 심경을 읊은 시이다. 앞 두 줄에서 자신의 처지를 말했다. 가을바람만이 괴롭게 분다고 하여, 자신은 외롭다고 했다. 외로운 이유는 ‘지음’이 적기 때문이다. 지음이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뒤 두 줄에서 바깥세상과 자신의 마음을 대비했다. 바깥세상은 한밤중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하다. 그런 가운데 비가 내리니 소란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방 안 등불 앞에 앉아 ‘만리’, 즉 저 먼 곳을 생각한다고 했다.
최치원은 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적다고 했을까? 최치원은 일찍이 12살 때 중국 당나라로 갔다. 왜 당나라에 갔는지, 그리고 당나라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12살 때 집을 떠나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려 할 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네가 십 년 공부하여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마라. 나도 아들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그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엄격하신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졸음이 오면 머리카락을 묶어 매달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공부하여 길러주신 뜻을 받들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이 백 번 하면 나는 천 번 하는 노력으로 중국에 간 지 6년 만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계원필경집서(桂苑筆耕集序)>의 한 부분이다. <계원필경집>은 최치원의 문집이다. 그 문집을 엮으며 서문에서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최치원이 당나라로 간 이유는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불철주야 노력하여 6년 만에 뜻을 이루었다.
신라 제27대 임금 선덕왕 때부터 수많은 청소년이 당나라에 유학했는데 6두품 출신이 다수였다. 골품제로 인해 6두품 출신은 신라에서 크게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38대 임금 원성왕 때에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이 시행되었지만(788년), 골품제의 테두리 안에서 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그래서 6두품 출신 젊은이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당나라 유학하여 과거시험을 보았다.
최치원은 가장 성공한 경우였다. 18살 때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토벌대장 고변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그때 황소의 잘못을 꾸짖는 <격황소서>를 지었는데, 황소는 그 글을 읽다 두려워 침상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 일로 최치원의 이름은 당나라와 신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최치원은 28살 때 귀국했다(885년). 당나라로 유학갈 때는 어린 나이여서 실감할 수 없었지만, 성인이 되어 신라로 돌아와서는 골품제의 벽을 절감해야 했다. 최치원은 진성왕 8년(894년)에 시무 10여 조를 올리고 능력을 인정받아 아찬으로 임명되었다. 아찬은 17개 관등 중 6번째 관등으로 6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최치원은 좌절했다. 자기 능력을 발휘할지라도 더는 승진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자신을 알아주는 ‘지음’이 적다며 한탄했다.
(2) ‘일대삼최(一代三崔)’의 선택
최치원은 시에서 창밖이 한밤중이라고 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최치원이 <추야우중>을 지을 당시 신라의 상황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지방 호족들이 반기를 들자 신라 조정은 통제력을 상실했고, 그 틈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진성왕 3년(889년)에 정부에서 세금을 독촉하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진성왕 10년(896년)에는 ‘적고적’이라 불린 집단이 민란을 주도하여 경주 인근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 집단의 사람들이 붉은 바지를 입고 활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진성왕은 “근래 이래로 백성들은 곤궁하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나의 부덕한 탓”이라며 스스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민란이 발생한 원인은 단지 진성왕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신분제도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진성왕이 물러남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마침내 나라가 분열했다. 견훤은 전주를 근거지로 하여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철원을 근거지로 하여 마진을 세워 신라 조정에 맞섰다.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신라는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고, 견훤과 궁예가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치원은 등불 앞에 앉아 만리 밖을 생각한다고 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지만 자신은 등불 앞에 앉아 있다. 신라가 위기에 처했지만, 최치원은 신라의 운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음은 오로지 ‘만리 바깥’으로 향했다. 만리 바깥에는 당나라가 있다. 최치원은 그곳에서 영광을 누리지 않았던가.
최치원은 가야산(경상남도 합천군 소재)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읊었다는 다음의 시에서 최치원의 심경을 알 수 있다.
겹겹이 쌓인 바윗돌과 산봉우리를 내달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니,
사람의 말을 가까이에서도 알아듣기 어렵구나.
혹시 세상의 귀찮은 소식이 내 귀에 들려올까봐,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눌러 덮게 했노라.
앞 두 줄에서, 깊은 산속에 파묻히니 물소리가 요란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조차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뒷 두 줄에서는, 세상 소식 듣기 싫어 요란한 물소리가 나게 했다고 했다. 최치원이 물을 흐르게 할 수는 없다. 세상일과 완전히 담쌓고자 하는 심경을 그렇게 표현했다. 최치원은 이 시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최치원과 같은 처지였지만 다른 선택을 한 인물들이 있었다. 최치원과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고 불렸던 최언위와 최승우가 그런 인물들이었다. 일대삼최란 같은 시대를 산 세 사람의 최 씨라는 말이다.
최언위와 최승우는 최치원과 마찬가지로 6두품 출신이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 급제를 한 것도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은 최치원과 다른 선택을 했다. 최치원이 도피를 선택하여 가야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최승우와 최언위는 적극적인 참여를 선택했다. 최승우는 후백제, 최언위는 고려에 가담하여 신라를 부정하고 나라를 바꾸는 길로 나아갔다.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6두품 출신자들은 ‘일대삼최’처럼 현실 도피를 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 변혁에 참여할 것인가,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시대든 지식인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어떤 선택이 최선의 것인지를 깨우치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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