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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연재3) 시-한국사

통일신라1

은선재 2020. 8. 25. 13:25

(1) 백성이 편안하려면

 

열치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자

아으 잣 가지 높아 서리 못 누울 화판이여.

 

충담사가 지은 <찬기파랑가>이다. 신라 제35대 임금 경덕왕(재위 742~765) 때 지어진 향가로,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기파랑은 화랑의 우두머리이다. 마지막 줄에 쓰인 화판에서 알 수 있는데, 화판은 화랑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노래의 내용을 보자.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난 은 기파랑을 상징한다. 기파랑은 높이 떠가는 흰 구름을 좇아가는 달처럼 고고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기파랑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만 있지는 않다. 냇물에 비친 달에서 기파랑을 볼 수 있다.

기파랑의 마음은 냇가의 조약돌처럼 단단하다. 그 마음의 끝자락이라도 좇고자 하나 쉽지 않다. 기파랑은 높은 잣 가지와 같다. 그곳에는 서리조차 내리지 않는다. ‘서리는 시련을 의미하니, 기파랑은 시련조차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 경지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찬기파랑가>는 단지 기파랑의 숭고한 뜻을 찬양하고자 지은 향가가 아니다. 충담사는 기파랑의 뜻을 좇아 어떠한 시련에도 이겨낼 수 있는 자세를 가다듬자고 말하고자 했다. <찬기파랑가>는 널리 알려진 향가였다. 경덕왕과 충담사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만나자, “일찍이 대사가 지은 기파랑을 찬양하는 향가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충담사를 만난 경덕왕은 자신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안민가>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노래인데, 충담사는 다음과 같이 향가를 지었다(765).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시면, 백성이 사랑하리라.

탄식하는 뭇 창생, 이를 먹도록 다스릴지어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느냐 하면, 나라가 유지되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가 태평하리라.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을 한 가족에 비유했다. 임금과 신하가 백성을 어린 자식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중세 시대의 정치이념인 애민(愛民)을 강조했다. 백성을 사랑하려면 백성들이 탄식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지 않으니 나라가 유지되리라. 그래서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이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게 결론이다.

경덕왕은 왜 충담사에게 <안민가>를 부탁했을까? <안민가>에 나오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임금은 아비, 신하는 어미라고 했다. 그렇게 표현한 데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 임금이 중심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자식을 잘 기르려면 아비와 어미가 긴밀히 협력해야 하듯이,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임금과 신하가 협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연한 듯하지만, 새삼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2) 내물왕계가 다시 임금이 되다

 

삼국통일이 이루어지자 신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영토와 인구가 늘어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변화가 불가피했다. 특히 왕권이 강화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귀족의 권한이 작지 않았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화백회의라는 귀족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그런데 삼국통일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삼국통일은 신라를 압박해온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라의 규모를 확대한 것을 의미했다. 그런 업적을 이룬 임금의 권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31대 임금 신문왕(재위 681~692) 때에 왕권이 절정에 이르렀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전국에 9주와 5소경을 설치하여 귀족들을 지방으로 보냈다. 아울러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녹읍제를 폐지했다(689).

녹읍은 귀족들이 받은 영토였다. 귀족들은 녹읍으로 받은 지역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신문왕은 세금징수권 이외의 권한을 박탈했다. 귀족들은 백성을 함부로 부릴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과 권한은 약해졌다.

그런데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반발이 본격화했다. 경덕왕 16(757)에 녹읍제가 부활했고, 경덕왕 24(765)에는 김양상이 상대등이 되었다. 김양상은 경덕왕과 대립하는 귀족 무리의 우두머리인데, 그런 인물이 행정기구의 최고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었다. 일종의 정변이었다.

경덕왕이 충담사에게 <안민가>를 부탁한 때가 바로 김양상이 시중이 된 직후였다. <안민가>에서 임금이 중심이라며 신하들의 협력을 강조했지만, 상황은 경덕왕이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과 표훈대사에 얽힌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임금이 하루는 표훈 대사를 불러 말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대사께서 하느님께 청해서 사내아이를 점지해 주시오.”

표훈 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께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하느님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주시오.”

표훈 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청하자,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바꿀 수는 있지만,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 대사가 돌아와 하느님의 말을 전하자, 임금이 말했다.

나라가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내 뒤를 잇도록 하고 싶소.”

임금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임금이 몹시 기뻐했다. 그 아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즉위하였으니, 이 사람이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본래 여자였는데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극을 맞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혜공왕은 16년간 재위했는데, 다섯 차례나 반란이 일어났다. 마침내 상대등 김양상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왕을 죽이고 즉위했다(780). 그 사람이 제37대 임금 선덕왕이다. 이렇게 하여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후손으로 이어지던 임금의 시대는 끝나고, 17대 임금 내물왕의 후손들이 임금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김춘추는 내물왕의 후손들로 이어지던 임금의 시대를 끝낸 인물이다. 이제 김양상에 의해 다시 내물왕 후손들의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김양상의 즉위는 임금 자리를 놓고 진골들이 치열하게 갈등, 대립하는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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