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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을 설치하다(1420년 3월 16일)
세종이 역정을 냈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 이유는 학술에 전념하라는 취지였다.......그런데 최근 들으니 집현전 관원들이 모두 학술을 싫어하고, 일반 행정직으로 전출을 희망하는 자가 자못 많다는 것이다. 나는 집현전 관원을 특별 대우하여 행정직 관리와 다를 바 없게 했는데도 학술을 싫어하고 전출을 희망하다니.......신하의 도리가 그런 것인가. 그대들은 태만한 마음을 거두고 종신토록 학술에 전념하라.
(<세종실록> 63권, 세종 16년 3월 20일)
집현전이 설치되고 14년이 지났을 때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의 태도에 실망하여, 다시 한 번 집현전 학사가 해야 할 일을 강조하게 되었다. 세종은 집현전을 중시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의 실현에 필요한 기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위 초부터 집현전 설치를 추진했고, 마침내 세종2년 3월 16일에 10명의 집현전 학사를 임명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를 우대했다. ‘반두(班頭)’라고 하여, 집현전 학사는 같은 등급의 벼슬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았다. 세종8년부터 사가독서제를 실시했다. 학사 중에서 선발하여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독서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집에서는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자, 진관사나 장의사 같은 절에서 독서를 할 수 있게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말하자면 ‘세종 키드’였다. 대부분 조선 개국 이후 출생하여, 세종 때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문종(세종의 아들) 이후 성종(세종의 증손자)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국정을 주도했다. 집현전 학사 출신 90여 명 중 정승까지 한 사람이 10명, 대제학 벼슬을 한 사람이 9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집현전 학사들은 왜 행정직으로 전출을 희망했을까? 집현전은 경연, 제도연구, 출판을 담당했다.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유교적 이상국가란 유교 교양을 갖춘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고, 사대부든 평민이든 신분의 구분 없이 유교 윤리를 생활화한 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임금이 유교 교양을 갖출 수 있게 하는 경연, 유교 윤리의 확산을 위한 출판, 그리고 유교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제도연구는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집현전은 새로운 세대가 의욕을 갖고 덤벼들만한 기관이었다. 그런데 왜 집현전에서 탈출하고 싶어 했을까? 학술 연구를 싫어했기 때문이 아니다. 출세 때문이었다. 장시간 공부하여 과거를 보는 이유는 출세 때문이다. 그런데 집현전에 들어가면 출세가 쉽지 않았다.
집현전에서 가장 높은 벼슬은 정3품 부제학이었다. 부제학이 되려면 정자-저작-박사-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응교-직전-직제학 등 10단계의 벼슬을 거쳐야 한다. 훈민정음 반대 상소로 유명한 최만리를 보자. 집현전이 설치될 때 박사로 임명되었는데, 부제학이 되는데 18년이 걸렸다. 그리고 6년간 부제학을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정승이나 판서까지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변화가 많고 출세도 빠른 행정직으로 전출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한번 집현전은 영원한 집현전’이었다. 세종도 강조했듯이 집현전 학사는 평생 집현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학사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불만이 상소 같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세종 16년 부제학 설순이 상소한 것이 시작이었다. 심지어 학사들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렇듯 학술 연구 기관인 집현전이 정치세력으로 되어갔다.
물론 세종 때에는 학술 연구 기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집현전 학사들은 행정직으로 진출했다. 학사와 학사 출신자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한 것이었다. 급기야 세조2년(1456년)에는 학사들과 학사 출신자들이 세조에 반란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집현전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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