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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연재3) 시-한국사

백제2

은선재 2020. 7. 14. 13:15

(1) 무왕, 전륜성왕을 꿈꾸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사랑을 하고,

서동 방으로 밤에 몰래 안겨 간다.

 

노래 제목은 서동요이다. 선화 공주가 남몰래 서동과 사랑했다는 내용이니, 노래 속 주인공은 선화 공주인데, 노래 제목은 서동요라고 했다. 왜 그렇게 제목을 붙었을까? 노래의 내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설화이다. 서동은 무왕(재위 600~641)의 어릴 적 이름이라고 했다. 서동이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해서, 노래 제목을 서동요라고 한다. 노래를 지은 사람의 이름을 노래의 제목으로 한 경우이다.

서동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한 이유는 선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선화 공주는 신라 제26대 임금인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고 하니, 최초의 여성 임금인 선덕왕의 동생인 셈이다.

서동의 작전은 성공했다. 노래가 궁궐에까지 알려지자 선화 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귀양길에 오른 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나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서동의 성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 임금이 되었다. 서동은 임금이 된 후 선화 공주의 소원을 듣고 절을 지어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다. 미륵사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 있던 절인데, 절은 없어졌고 석탑만 남아 있다.

서동 설화는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서동과 선화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실제인지를 두고 구구한 추측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2009년에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서동과 선화 공주의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작아졌다.

금제사리봉안기는 미륵사를 건립한 내력을 담은 문서이다. 그 문서에 따르면,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시다.”라고 했다. 미륵사의 건립은 사택적덕의 따님이 주도했다고 것이니, 선화 공주와 미륵사를 관련지을 근거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선화 공주가 무왕의 부인이었을 가능성마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무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했다. 전륜성왕은 산스크리트어 차크라바르틴(cakravartin)’를 번역한 말인데, 부처와 같은 존엄성을 지닌 이상적 임금을 말한다. 무왕이 즉위할 당시, 백제의 국내외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국내적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면서 왕권이 불안했고, 국제적으로는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을 받았다. 무왕에게는 왕권 강화를 상징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륜성왕을 자처했고, 미륵사를 창건했다.

서동 설화 역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출생이 남다르고 신라의 공주와 결혼했으니, 무왕의 능력은 대단하다. 무왕은 41년간 재위하며 내부를 안정시키고 신라를 공격하여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 그렇지만 백제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었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 때,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660).

 

(2) 일본, 지원군을 파견하다

 

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위치한 나라였다. 서쪽 바다 건너에는 중국이 있고, 남쪽 바다 건너에는 일본이 있다. 이렇듯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백제는 중국, 일본과 활발히 교류했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 부활 운동을 도왔다. 당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631년에 일본으로 가서 머물고 있었다. 무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의 요청으로, 부여풍은 일본이 지원한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돌아왔다. 비록 부여풍이 이끈 군대는 패배했지만, 백제와 일본이 매우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백제가 존속했을 당시 일본은 어떤 상태였을까? 일본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부족들이 일본의 규슈 북부와 혼슈 서부를 거쳐 야마토 지역(지금의 일본 나라현 일대)에까지 진출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1백여 개에 달했는데, 2세기 후반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결과, 야마토 평원에 터전을 둔 야마타이 국의 히미코가 전체를 대표하는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일본 황실이 시작되었다. 히미코는 여성 사제장이었다. 히미코가 세상을 떠나자, 지름이 100여 보에 이르는 커다란 무덤에 매장하고 노비 100여 명을 순장했다. 사제장이 임금이 되고, 임금의 사후 생활을 위해 노비를 순장하던 시대가 고대였다.

일본의 중세화는 쇼토쿠 태자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 최초의 여성 천황인 스이코(재위 592~628)가 임명한 섭정이었다. 쇼토쿠는 세 차례에 걸쳐 중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선진적 문물을 수입했고, 12개의 관직과 17개 조의 헌법을 제정하여, 일본이 중세국가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했다.

백제는 일본의 중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백제가 일본과 공식적 관계를 맺은 것은 고이왕(재위 234~286) 때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에는 왕인과 아직기를 파견하여 <논어><천자문>을 가르쳤다. 성왕은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다(532). 일본에서는 불교의 수용을 두고 논란을 벌인 끝에 받아들이기로 하고, 쇼토쿠 태자는 17개 조의 헌법에서 불교를 국가적 종교로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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