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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판본 보존 대책을 세우다(142541)

 

불경의 판본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대책을 세웠다. 숭유억불에 어긋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본 국왕뿐 아니라 여러 섬의 영주들 중에서 불경의 판본을 요청하는 자가 꽤 많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서울과 지방의 폐지된 절과 중이 없는 절에 비치해 두었던 금, 은으로 쓴 불경, 인쇄된 불경, 붓으로 쓴 불경, 그리고 경판을 무식한 자들이 훔쳐 가거나 파손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일본에서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서울에서는 선종과 교종에 시키고, 지방에서는 고을 수령을 시켜 조사하고 살펴 거둬 모아서, 중들이 모여 있는 절에 옮겨 두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각 절에 있는 여러 불경과 경판의 숫자를 장부에 기록하여 아뢰게 하소서. 

(<세종실록> 28, 세종 741일) 

 

예조에서 건의하고 세종이 받아들였다. 불경의 판본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외교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에서 홀대받는 불경이 일본과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의 상황으로 인해 많은 수의 불경이 필요했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대였다. 바쿠후의 쇼군(將軍)을 일본 국왕이라고 했는데, 쇼군의 권력이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다이묘(大名)라 불리는 토호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이묘들은 바쿠후와 별도로 사신을 보내 조선과 통교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성행하던 때여서 일본 국왕이든 다이묘든 조선에 불경을 요청했다.

불경 인쇄에 필요한 <대장경> 판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종51225, 일본 사신단이 세종에게 일본 국왕의 서신을 전달했다. 사신단 규모가 153명으로 대규모였다. 일본 국왕은 서신에서 이렇게 요청했다.

 

귀국에 <대장경> 판이 하나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대장경> 1본을 보내주시면, 이곳에서 받들어 보관하면서 인쇄하여 불교를 신봉하는 무리들에게 주고자 합니다.(<세종실록> 22, 세종 51225일)

 

<대장경> 판은 고려 때 만들어진 <팔만대장경> 판을 말한다. <대장경> 판이 있다면 불경을 얼마든지 인쇄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장경> 판이 여러 개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 국왕은 <대장경> 판을 요청했고, 그것을 가져가기 위해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세종은 이 문제를 두고 대신들과 의논했다. 세종은 <대장경> 판이 조선에서는 무용지물이니 일본의 요청을 들어주자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반대했다.

 

경판은 아낄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요청을 일일이 들어주다보면, 나중에 들어줄 수 없는 물건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먼 앞날을 생각해야 합니다.(<세종실록> 22, 세종 51225일)

 

세종은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 사신에게 우리나라에 <대장경> 판은 1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대신 <밀교대장경> , <주화엄경> , <한자대장경> 전부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일본 사신은 저희가 요청한 것은 <대장경> 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주신 것은 모두 다른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우리 국왕의 뜻에 맞지 않을 것이고, 저희들은 견책을 당할 것입니다.”(<세종실록> 22, 세종 51227일)라고 반발하며, 급기야 단식에 들어갔다. 세종은 사신들을 달래며 회례사 파견, 금으로 쓴 <화엄경> 1부 추가 제공을 약속했다.

세종627, 판선공감사 박안신을 회례사로 하는 조선의 사신단 일행이 일본으로 출발했다. 세종은 일본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대장경> 판은 오직 한 벌뿐이고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물건이어서 요청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밀교대장경><주화엄경> 판을 신하 판선공감사 박안신과 호익시위사 대호군 이예에게 가지고 가게 하여 사례하는 마음을 표하는 바입니다.......또한 변변치 않으나 신의의 표시로, 금으로 쓴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1, 금으로 쓴 <아미타경> 1, 금으로 쓴 <석가보> 1, 푸른 종이에 금으로 쓴 <화엄경> 1, <대장경> 1, 대홍라 가사에 초록라로 장식한 것 한 벌, 자라괘자에 아청라로 장식한 것 한 벌, 남라장삼 한 벌, 검은색 세마포 15, 붉은색 세저포 15, 흰색 세저포 15, 꽃무늬 돗자리 35, 5백 근, 인삼 1백근, 20, 표범 가죽 5, 호랑이 가죽 5, 여러 색깔의 담비 모피 10, 검붉은 담비 모피로 만든 승려 신발 한 켤레를 보냅니다.(<세종실록> 23, 세종 627일)

 

회례사가 가져가는 경판, 불경, 그리고 예물은 방대한 양이었다. 그것들을 수송하기 위해 소와 말 150마리를 동원해야 했다. 그런데 통상 3~4달이면 돌아와야 할 회례사가 무려 10개월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박안신 등 회례사 일행은 일본에 도착한 후 55일 동안 일본 국왕에게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 <대장경> 판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일본 국왕이 화가 났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회례사를 붙잡아 두고 조선을 침략해 <대장경> 판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회례사 일행은 521일이 되어서야 당시 일본 수고인 교토에 들어갈 수 있었고, 한 달 후인 625일이 되어서야 일본 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국왕은 불경과 경판만 받고 세종이 보낸 예물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장경> 판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조선 회례사의 입장에서는 세종이 보낸 예물이 더 소중하다. 박안신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서 예물의 중요성을 설득했고, 일본 국왕은 마지못해 예물을 받았다.

박안신 등 회례사 일행은 72일 동안 교토에 머물다 돌아왔다. 일본 국왕은 박안신을 통해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보내주신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선물에 감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대장경> 판입니다. 그 이외에는 진귀한 물건이 아무리 산처럼 쌓여 있다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경과 경판만 받고 나머지는 모두 받지 아니하려 하였지만, 사신이 여러 차례 예의에 어긋나고 국교를 끊는 것이라며 가져가지 아니하므로, 도로 보내지 못하고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사신이 내왕할 때에 토산물을 예물로 보낼 필요는 없고, 다만 교린의 친목만 닦아서 상호간 국가의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전권 사신으로 중윤서당을 보내어 다시 자세히 말할 것인데, <대장경> 판을 우리나라에 주신다면, 무엇을 준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세종실록> 26, 세종 61217일)

 

이때 일본 국왕은 무로마치 바쿠후의 제5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카즈(足利義量)이었다. 요시카즈는 <대장경> 판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막무가내의 태도를 보였다. 세종의 간곡한 설명을 무시하고, 다시 사신을 보내 <대장경> 판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요시카즈가 보낸 사신은 세종74월에 왔다. 이때 보낸 편지에서 <대장경> 판을 다시 요청했다.

 

비록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지만 깊이 아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바라옵건대, 생각을 바꾸시어 불법을 위하여 <대장경> 판을 우리나라에 주시면 이웃과 호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종실록> 28, 세종 7412일)

 

조선에서는 <대장경> 판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으니,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얘기였다. 세종은 “<대장경> 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로 내가 감히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며 다시 한 번 정중히 거절했다.

이상의 사건을 거치면서 <대장경> 판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달라졌다. 훗날 세종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서 여러 차례 <대장경> 판을 요청했으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억지로 요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세종실록> 77, 세종 19428일) 

 

요시카즈가 사망하고, 일본 내 정세가 혼돈에 빠지면서 <대장경> 판을 요구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지만 다이묘들의 불경 요청은 계속되었다. 이에 대비하여 조선에서는 남아 있는 불경과 경판의 보존과 관리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경이 부족해지자 인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숭유억불의 이념도 중요했지만 이웃나라와 외교 역시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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