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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1737~1805)은 별로 시를 짓지 않았다. 시 짓기로 학문과 문학의 실력을 겨루던 때였다. 당시 문인들은 중국에서 틀을 갖춘 한시(漢詩)를 배워 시를 지으며 뽐냈다. 시 짓기는 외교에서도 한몫했다. 사신과 사신을 맞이하는 문신이 한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문화 수준을 견주었다. 이런 시대에 시를 별로 짓지 않았다는 것에서 박지원은 출세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지원은 주로 산문을 썼고 소설을 썼다. 당시 산문은 잡문(雜文)이라 했고 소설은 패관(稗官)이라 했다. 산문이든 소설이든 잡스러운 글로 취급되고, 글로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박지원은 왜, 시를 짓지 않고 소설을 썼을까?
시는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 문학 작품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든 작가의 생각과 감정이 드러나지만, 시는 특히 작가의 내면세계가 일방적으로 드러나는 문학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기쁨, 슬픔, 외로움, 괴로움, 사랑, 욕심, 증오와 같은 감정을 드러냈고, 숭고하거나 우아하거나 비장하거나 익살스러운 세상사를 보여주었다.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소설에서는 여러 인물이 대립하고 갈등하고 대결한다. 대립과 갈등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언제든 대립과 갈등이 되풀이될 수 있다. 소설은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문학 작품이다. 소설가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소설에 담으려고 한다. 소설가는 스스로 ‘세상과 불화한다’라고 말한다.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1435~1493)은 ‘신세모순(身世矛盾)’이라고 했다. ‘나와 세상은 모순된다’라는 말이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1569~1618)은 ‘불여세합(不與世合)이라고 했다. ‘나와 세상은 화합하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박지원은 어떠했을까? 박지원은 『사기』를 쓴 사마천에 영향을 받았는데, 사마천이 글을 쓴 동기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아이들이 나비를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벌리고 앞으로 가서 손이 닿을 듯 말 듯할 때, 나비가 날아가 버린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다. 멋쩍게 웃고 성난
듯 부끄러운 듯한 이때가 바로 사마천이 글을 지을 때다.(박지원, <답경지(答京之, 경지에게 보낸 답장)
나비를 잡지 못했으니 ‘불만’이다. 화가 나고 주변에 누가 보고 있었다면 부끄럽기도 하다. 그때 사마천이 글을 썼다고 했으니, 박지원은 사마천이 글을 쓴 동기가 ‘불만’이라고 보았다. 박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있어서 글을 썼고, 그래서 시보다 산문과 소설을 썼다.
박지원은 일찍부터 소설을 썼다.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진 『양반전』, 『예덕선생전』 등 7편의 소설은 10대 말에 썼다. 박지원은 소설에서 양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아버지가 10대 말에 우울증을 앓았고, 우울증 치료를 위해 만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라고 했다. ‘아버지를 위한 변론’이라고 할 것이다. 우울증을 치료한답시고 양반이 하층 신분의 사람들을 만나고, 부랑아나 도적을 만나고 하지 않는다. 훗날 박지원은 패관 문학의 주범으로 찍혀 정조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박종채는 아버지를 변호하고자 우울증을 끄집어냈을 것이다.
박지원이 지은 시는 많지 않지만, 박지원의 내면세계를 알려면 시를 보아야 한다. 설날을 맞이하며 쓴 시가 있어서 눈길을 끈다. 제목이 <원조대경(元朝對鏡)>이다. ‘원조’는 ‘설날 아침’이고, ‘대경’은 ‘겨울을 대한다’라는 말이니, 원조대경은 ‘설날 아침에 거울을 대하고’라는 뜻이다. 설을 맞아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느끼는 소회를 적은 시라고 할 것이다.
두어 올 검은 수염이 갑자기 돋았으나
육 척의 몸은 전혀 커지지 않았네.
거울 속 얼굴이 세월 따라 달라졌어도
철모르는 생각은 작년의 나 그대로구나.

설날 아침에 거울을 꺼내 자기를 비춰본다. 검은 수염이 돋았다고 하니 청년 시절이다. ‘육 척의 몸,’ 박지원은 체격이 컸던 듯하다. 말년에 손주가 그린 그림에서도 박지원의 체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거울 속의 얼굴은 해마다 달라진다. 겉모습이 달라진다고 생각마저 달라질까? 몸은 성숙해도 정신은 여전히 성숙하지 못하다.
설날 아침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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