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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을 보면,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를 두고 논란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카의 저서를 ‘불온서적’으로 분류한 것에 대해 영국 정부에서 항의했다는 내용이다.
카는 20여 년 간 영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의 외교관 이력 중 대표적인 것은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 참석일 것이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승리한 연합국들이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 카는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쓴 저서를 ‘불온서적’이라 했으니 영국 정부의 항의는 당연했다.
그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었던 카의 저서는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카는 외교관 생활을 그만둔 후 대학에서 국제정치와 역사를 가르치며,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가 1961년 1월에서 3월까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한 강연내용을 묶은 저서이다.
왜 <역사란 무엇인가>를 ‘불온서적’으로 분류했을까? 그 이유를 알 길은 없다. 하긴, 수많은 대중가요를 뚜렷한 이유 없이 금지곡으로 지정하던 시대이니, ‘권력자 마음대로’가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책이든 음악이든 문화를 억압하는 일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불온서적 목록을 만들어 억압한 것은 중국 진나라의 분서(焚書)를 연상시킨다. 진시황은 자신에 비판적인 서적을 모아 불태웠다. 그 결과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나라는 분서 사건을 일으킨 지 7년 만에 멸망했다.
추측컨대, <역사란 무엇인가>가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이유는 당시 ‘시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즐겨 읽었던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독재가 자행되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두고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요즘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자기계발서’가 눈에 많이 띈다. ‘경제적 성공’이 주요 관심사란 얘기일 것이다. 사회 양극화, 청년실업, 조기 퇴직 등이 심화되는 상황의 반영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성공’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이라도 희구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불과 한 세대의 시간을 두고 관심사와 고민거리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렇다고 하여 한 세대 전과 지금이 분리된 것이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분투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 지금의 상황이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분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상 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역사란 무엇인가?’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대단히 인상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다. 카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설명하고자 자신의 글쓰기 과정을 예로 들었다.
“나는 우선 주요한 사료를 조금 읽자마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대로 쓰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읽는 것과 쓰는 것을 병행한다. 한편으로는 읽어 나가며, 또 한편으로는 써놓은 것을 보충하고, 빼고, 다시 쓰고, 지워버린다. 쓰는 동안 무엇을 읽을 것인지 더욱 분명해진다.”
흔히 역사가는 모든 자료를 읽고 내용을 확정한 다음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는 적어도 자신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료를 읽다 생각나면 바로 쓰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읽고 쓰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한 편의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다.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현재’인 역사가와 ‘과거’인 사실의 상호작용을 두고 한 말이다. 이 표현을 통해 카가 말하고자 한 바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가는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또한 역사가는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를 과거에서 찾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카가 역사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카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했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역사가 일직선으로 나아간다고 하지 않는다. “진보는 정체될 수도 있고 역행과 불행으로 인해 중단될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이 정해진 것도 아니라고 했다.
카가 말한 진보란 “말 그대로 앞으로 계속 움직이는 것, 인간이 신념을 가지고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 목적을 향한 의식적인 움직임이다.” 따라서 진보가 어떤 특정 이념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진보란 정체의 반대개념, 즉 변화를 의미한다.
카의 정의에 동의한다면, ‘가치가 있는 목적’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가치 있는 목적을 향한 의식적 움직임을 통해 역사가 진보해왔음을 말하고자 했다.
우리의 역사는 어떠한가. 우리의 지난 역사는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과정이었다고 한다. 경제후진국에서 경제성장을 제1의 가치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경제성장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억압한 게 문제였다. 따라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난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 이 두 가지는 ‘가치 있는 목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목적은 모두 성취되었다. 대한민국은 경제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무엇을 향해 움직여야 하는가? 사회 양극화, 청년실업, 조기퇴직 등이 현실의 문제로 등장해 있다. 이 문제들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점차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저성장이 현실임을 인정하고 인식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경제의 논리보다 ‘사람 존중’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전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19세기 말,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여,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간절히 호소한 바 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죽었다.”고 한탄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무시되거나 잊혔다.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점차로 과거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사람에 대한 관심’은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경제의 논리 앞에 ‘사람 존중’의 목소리는 한없이 무기력했다. 이제 관심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치 있는 목적’이 되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끝맺는다. “그래도 역시―그것은 움직인다.” 과연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생각할 때이다. (<위클리 공감> 439호, 2018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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